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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롬파티 롴솦
    순철논 2026. 1. 25. 20:38


     내가 할 수 있어― 평소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고등학생인 소피아는 물론, ‘한지혜’도 딱히 화장을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7세기-근대-철학자-남자-고등학생보다는 아무래도 직접 하는 게 훨씬 낫지 싶었다. 심지어, 로크는 브러쉬를 쥔 손을 눈에 띄게 떨고 있기까지 했다. 저걸로 뭘 바른다고? 눈이나 안 찌르면 다행이겠다. (모순적이게도, 손을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맡기고 싶지 않아지는 동시에, 거절하기 힘들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럼 대충만 해줘.”

     나는 포기했으니 네 좋을 대로 해보라는 식의 투였음에도, 한순간에 로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가 들고 있는 가느다란 브러쉬는 살면서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종류였다. ···아무리 봐도 눈을 공격하는 데 적합한 무기로 보였다.

     “어, 그럼, 소피··· 괜찮다면, 눈 잠깐만 감아줘.”

     소피는 순순히 눈을 감아주었다. 딱히 못 해줄 일도 아니었으니까··· 만약 눈을 찌른다면, 아마 찌르겠지만, 그냥 받아들이자. 눈을 감은 채로 기다리다 보니, 방금 본 가느다란 것 대신 부드러운 솔 같은 것이 눈꺼풀 위를 톡톡 두드렸다. 솔은 아주 조금만 더 머물러 있으면 간지러워서 웃어버릴 것 같은 감각을 선사하면서도, 정작 진짜로 그렇게 되기 직전에는 급하게 자리를 뜨는 식으로 절묘하게 움직였다.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분명 방금까지도 떨리고 있었던 로크의 손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소피는, 그의 손이 아니라 자기 눈꺼풀이 제멋대로 떨리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설마, 얘는 잠깐 비켜 있고 누구 딴 사람이 와서 바르고 있는 거 아니야? ―영양가 없는 딴생각이었지만, 부드럽게 간질거리는 감각을 참고 견디는 데는 그럭저럭 도움이 되었다. 아슬아슬했지만, 소피는 끝까지 웃음을 터뜨리지 않는 데 성공했다. 아마 웃어버렸다간 기어코 눈이 찔리고야 말았을 것이다.

     다음은 가느다란 브러쉬였다. 대체 무슨 종류의 화장품인지는 잘 몰라도, 차갑고 축축한 무언가가 속눈썹 라인을 따라 천천히 훑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답답하거나 망설이는 느낌 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여유롭게 쓸어주는 느낌. 그러니까, 생각보다 꽤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이제 눈 떠도 돼.”

     소피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눈을 떴다. 시야가 트인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휙 물릴 뻔했다. 다행히 움직이지 않는데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조금 흠칫거리는 수준에 그칠 수 있었다. 바로 눈앞에 위치한 로크의 두 눈동자. 그는 소피의 눈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기에, 지근거리에서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는 일만은 면했다. 대신에 로크는, 무언가에 순수하게 몰입한 듯한 눈으로, 그전에 비하면 놀랄 만큼 침착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소피의 볼을 파우더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다가.

     마침내 화장품을 쥐고 있던 손이 완전히 거두어졌다. 소피의 턱을 살짝 받치고 있던 손은 그보다 조금 늦게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 사이에, 로크의 집중한 시선이 마치 제 작업 결과에 이상이 없음을 재차 확인하듯이, 소피의 얼굴을 빠르게 사악 훑었다. 아무 동요 없이 침착하게 이동하던 시선이 마지막으로 멎은 곳은,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회색 눈동자 그리고 그제야 마주친 눈. 눈치채기 힘들 만큼 미세한, 약간의 경직과 살짝 쭈뼛거리면서 거두어지는 손. 그러한 뻣뻣한 행동에 대해 어떤 변명이라도 시도하듯이―

     “다 됐어.”

     ―하고 속삭이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다소 성급해 보이는 동작으로 화장품들을 정리한 로크의 손이 잠깐 허공을 방황하다가, 제 넥타이 근처에서 어색하게 헛손질했다. 마치 입고 있는 자켓의 깃을 습관적으로 살짝 잡아당기는 듯한 동작이었지만, 그의 외투는 이미 한참 전부터 소피의 어깨 위에 얹어져 있었다.

     외투를 돌려줄까도 싶었지만, 이 타이밍에 돌려주는 것은 아마 그를 더 곤란하게 만들 것 같았다. 그리고 애초에 로크가 그녀 앞에서 곤란하다는 듯 굴기 시작한 이유는,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아마 ‘소피’가 처음부터 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면, 너희와 동등한 위치에서 진정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동갑내기 친구였다면 끝까지 몰랐을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소피아는 한지혜였다. 스물네 살의 철학과 4학년― 너희를 진짜라고 생각할 수 없는.

     어느 날의 퇴근 이후, 유난히 눈에 띄었던 그래프. 소피를 향한 소년의 감정 상태는 호감도라는 이름으로 수치화되어 바로 그 상대의 눈앞에 던져졌다.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그렇게 단순화시켰기에 더 잔인하게도.

     인간관계에 있어 그런 떳떳하지 못한 반칙을 쓴다는 것에 대해, 다른 애들은 다 일이니까 그럴 수 있다는 식으로 넘어갔더라도··· 로크에게만은 뜻 모를 미안함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오늘 밤 그의 파트너인 ‘소피’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했으니. 지금 제 파트너에게 차마 같이 가자는 말도 못 꺼내고 있는 이 소년에게, 계속 같이 있어 줄 생각도 없으면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일까―

     “가자.”

     ―나쁜 일일까···

     여느 때의 소피가 그랬듯, 복잡한 생각이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말과,

     “이러다 늦겠어.”

     말보다도 먼저 뻗어버린 손.

     “···응!”

     그리고 그게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는 듯이, 티끌 없는 순수한 기쁨으로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제 손을 조심스럽게 겹치는 네 모습은···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에, 아마 가장 끔찍한 죄책감으로 마음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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