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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글 백업순철논 2026. 1. 27. 15:35
#벸홉 딱 한 번, 티타임을 함께한 적이 있다. 일이 그렇게 된 경위까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싶다. 토마스 홉스는 서리 낀 창문 너머로 슬쩍 시선을 보냈다. 달이 보이지 않았고, 며칠 전에는 진눈깨비가 한바탕 내렸으며, 그 이후로는 계속 쌀쌀했다든지··· 기타 등등. 종합하자면 그리 좋지도 않고 최악도 아닌 날이었으므로, 그날이 어떤 날이 될지는 전적으로 그 남자를 만난 밤 아홉 시경을 기점으로 결정될 운명이었다. 나중에 언젠가라도 이날을 회상하는 순간이 온다면, 과연 오늘은 좋은 날로 기억될지 최악의 날로 기억될지. 던져진 운명의 주사위는 아직 공중을 느릿하게 유영하며 눈을 이리저리 바꿔대고 있다. 아홉 시 정각에서 일 분이 막 지나려는 시점에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지방을 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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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파티 롴솦순철논 2026. 1. 25. 20:38
내가 할 수 있어― 평소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고등학생인 소피아는 물론, ‘한지혜’도 딱히 화장을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17세기-근대-철학자-남자-고등학생보다는 아무래도 직접 하는 게 훨씬 낫지 싶었다. 심지어, 로크는 브러쉬를 쥔 손을 눈에 띄게 떨고 있기까지 했다. 저걸로 뭘 바른다고? 눈이나 안 찌르면 다행이겠다. (모순적이게도, 손을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로 맡기고 싶지 않아지는 동시에, 거절하기 힘들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럼 대충만 해줘.” 나는 포기했으니 네 좋을 대로 해보라는 식의 투였음에도, 한순간에 로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가 들고 있는 가느다란 브러쉬는 살면서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종류였다. ···아무리 봐도 눈을 공격하는 데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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벸홉순철논 2026. 1. 12. 23:50
싸한 맛이었다. 기억하기로는 처음부터 그랬다. 몇 번쯤은 아닐 때도 있었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의 기억은 강하게 남는 법이다. (처음이니 하는 감상적인 표현을 쓸 생각도 없었고, 그런 걸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 이후로도 그 남자는 종종 그 처음을 상기시키는 경험을 선사했다.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제집처럼 상주하는 실험실, 그 안쪽 서랍에 사탕 한 꾸러미가 있음을 안다. 그는 무언가를 입에 넣고 굴리는 행위로써 환기해 보겠다는 심산인지, 꾸준하게도 흰색 박하사탕을 집어 먹곤 했다. 맛이 화해서 잠이 깨··· 제법 좋아. 특유의 나른한 톤으로 사탕을 집어 건네던 모습. (물론, 홉스는 그 사탕을 한 번도 받아먹지 않았다) 마치 지나가다 문득 생각나서 가볍게 들른 듯한 행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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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글내문] 파우스트 : 사랑이 시작된 순간순철논 2026. 1. 8. 17:48
트친 글 내 문체로 쓰기원문 링크: https://www.postype.com/@tnscjfshs/post/2072777 파우스트: 순철논#순정철학논고 #순철논 #짱논 #니체칸트 #닟칸 -파우스트 한 잔. 또 이 손님이다. 금요일 저녁에 찾아와 부러 도수 높은 술들만 마셔대며 스스로가 취하길 기다리는 사람. 취하는 것을 좋아하는가www.postype.com 원작자 찹쌀떡(@rlazpzpz)님께 드림 - 오늘은 그 남자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짧고 편해 보이는 기장의 머리카락과 그에 어울리는, 적당히 날카로운 인상. 주로 방문하는 시간대는 금요일 저녁. 담담하게 술을 주문하는 음성은 그리 중후하지는 않지만 경박하지도 않은, 말하자면 소년티를 아주 다 벗어버리지는 않은 목소리··· 어지간히 술이 오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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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순철논 2025. 12. 31. 13:36
캔터피(@xssthedream)님 썰타래 팬 창작원본 링크: https://x.com/xssthedream/status/2003005978275708929 - 네 죽음은 아마 그렇게까지 슬픈 사건은 아닐 것이다. 네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해 보자. 오래된 여관의 계단에서는 나무판자가 삐걱대는 소리. 꼭대기 층, 다락방에 다다라 문을 열면 방 안에 가득찬 먼지가 훅 끼쳐온다. 책상 위에는 가지런히 정리된 수공예 재료들 위로 또 소복이 쌓인 먼지. 낡은 방과 비슷한 색조의 책장에는 한동안 누구도 손대지 않은 책들 틈새로 어느 해의 학교 신문 9월호가 대충 접힌 채로 꽂혀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비스듬히 자리한, 색 바랜 노트 한 권. 그게 네 삶을 담은 책일 것이다. 집어 들면서도 표지가 떨어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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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벤솦순철논 2025. 12. 10. 16:50
사람을 굳이 둘로 분류하는 이분법의 논리. 충분히 식상하고 또 조금은 우습지만, 어쨌든 세상 사람을 나름의 기준에 따라 두부 자르듯 반으로 나눈다면, 누군가는 이런 기준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에만 우산을 챙기는 사람과, 일 년 내내 우산을 가방에 챙겨 넣고 다니는 사람. 한지혜는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자였다가, 시간이 흐르며 후자로 옮겨왔다고 해야 하겠다. 평생 쌓아온 경험과 기억― 지금의 한지혜를 구성하는 것 중 어떤 조각이 그런 사소한 변화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른다. 그냥 아무런 예고도,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에도 대비할 수 있으면 좋으니까. 어떤 종류의 갑작스러움이든 지수가 사라졌어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지만, 가야 해요 기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