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벸홉
딱 한 번, 티타임을 함께한 적이 있다. 일이 그렇게 된 경위까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싶다. 토마스 홉스는 서리 낀 창문 너머로 슬쩍 시선을 보냈다. 달이 보이지 않았고, 며칠 전에는 진눈깨비가 한바탕 내렸으며, 그 이후로는 계속 쌀쌀했다든지··· 기타 등등. 종합하자면 그리 좋지도 않고 최악도 아닌 날이었으므로, 그날이 어떤 날이 될지는 전적으로 그 남자를 만난 밤 아홉 시경을 기점으로 결정될 운명이었다. 나중에 언젠가라도 이날을 회상하는 순간이 온다면, 과연 오늘은 좋은 날로 기억될지 최악의 날로 기억될지. 던져진 운명의 주사위는 아직 공중을 느릿하게 유영하며 눈을 이리저리 바꿔대고 있다.
아홉 시 정각에서 일 분이 막 지나려는 시점에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지방을 넘어 들어온 이는 얼굴에 쓸데없으리만치 태연한 미소를 덧씌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문을 열 때 힘 조절을 잘못했지만, 원래부터 그런 식으로 박력 있게 등장할 계획이었던 것처럼 보이기 위한 미소인 듯했다. 그러한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한 마디―이야, 아슬아슬했네!―시간이? 문 내구도가? 아니면 간신히 어깨에 매달려 있는 실험실 가운의 수명? 문가에 선 프랜시스 베이컨에게서는 아슬아슬한 요소가 너무 많아 보였기에, 홉스는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감도 잡지 못했다.
물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홉스는 탄 냄새를 빼기 위해 조용히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힌 뒤에 다시 돌아와서 찻잔을 집었다. 차는 어떤 종류로 하시죠?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뻔히 알면서도 묻는다. 네가 마시는 걸로. 그리고 돌아오는 것은 뻔한 대답. 홉스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미 두 사람 몫의 자스민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구구절절한 사담에도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그의 손이 잠시나마 멈춘 시점은.
- 한 번의 찬란한 성공을 위해 백 번의 실패를 감수하는 거, 네가 생각해도 비합리적이지 않아? 아, 이런 표현은 싫어하려나. 아무리 앞에 비(非)가 붙었다 해도?
-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 난 홉스가 걱정돼서 그러지? 합리니 연역이니 하는 말 쓰는 녀석들 보금자리 없애는 데 미친놈처럼 집착하고 있잖아, 너.
- 하하, 그 방면에서 제가 당신에게 상대나 되겠습니까.
- 그럼, 그럼. 당연하지··· 미치지도 않고선 이 재미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라고!
차와 함께 즐길 다과로 이보다 더 나쁜 대화 주제는 있으래야 있을 수가 없을 것 같다. 홉스는 펄펄 끓는 자스민 차를 조금 식힐 생각도 없이 그냥 부어서 내놓았다. 그 와중에도 잔을 내려놓는 데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맑은 액체 표면으로는 자그만 기포가 하나 톡, 올라온다. 던져진 지도 한참인 주사위는 언제쯤 땅에 떨어지려는지― 그 또한 맞은편의 남자가 허락해야만 결정될 일일 것 같다. 그러니까··· 언제쯤이면?
#칸트
···네, 네. 잘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제 의견을 말씀드리면 되나요?
어, 그런데 왜 저에게··· 아니, 말하기 싫다는 건 아니고요! 데카르트 선배님이 얼마나 대단하고 유명한지 이곳의 모두가 다 아는데, 감히 제가 말을 얹어도···
···맞아요. 할 말이 없어서 망설이는 건 아니에요. 물론, 대단한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되니까요.
인간의 손으로 이룬 발전을 위해 전체로서의 향수를 포기한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빛나는 도덕성이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런 세상은 위험해요. 아무리 찬란한 문명을 이룩했어도, 그 속도를 쫓아가기를 포기해 버린다면 우리는 모두 죽은 별이 되어버리겠죠.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은 아니에요. 인간은 이미 신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니까요. 그러니 이후의 해결책 또한 인간의 이성 아래에서 만들어가야겠죠.
우리는 모두 각자의 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별이에요. 천 명의 사람이 있다면 천 가지의 빛이, 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만 가지의 서로 다른 빛이 있을 거예요.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에요. 그걸 인정하면서도, 만약 그 많은 별이 공통으로서 합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저는 보편성이라고 부를 거예요.
신으로부터 독립한, 인간 이성의 시대··· 그 활짝 열린 문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과거의 유산들. 어쩌면, 그것들을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은 묶어둘 수 있지 않을까요.
···‘열린 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올해 입학시험, 문 닫고 들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벤르네
계단에서 굴렀어.
벤 스피노자의 이 짧은 해명으로부터 르네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사고의 과정을 이끌어 냈다.
흔히 계단에서 넘어진다는 결과의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거나 발목을 접질렸거나 하는 것인데, 요점은 어느 쪽이든 그러한 사고는 발 혹은 다리의 부상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나, 맞은편에 앉은 벤의 상태를 보건대 언뜻 드러난 발목이며 종아리에는 붓기는커녕 상처 하나 없음이라, 혹은 굴렀다는 결과에 대해 명확한 원인을 말해주지는 않았으니 타의에 의해 계단으로 던져진 상황도 상상해 볼 수는 있겠으나, 겉으로 보이는 상처들은 이상할 만큼이나 상반신, 특히 얼굴과 목 주변에 몰려있으므로 이쯤에서 그의 말을 전면 부정하는 한이 있더라도 계단이라는 환경에서 완전히 벗어난 가정을 세워 볼 필요가 생겼기에, 그러자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평소에 비해 잔머리가 훨씬 더 많이 튀어나와 있어 산발이라는 표현으로 불러도 과장이 아닐 듯한 머리카락― 르네를 만나기 전에 머리카락을 정돈해서 다시 묶을 시간이 충분했다는 점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최대한 삼가는 벤의 성향상 그게 가능한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음을 고려하면, 손의 상처는 머리를 묶는 동작이 어려울 만큼이나 겉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 심한 상태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10월 말의 서늘한 날씨에 더해 종종 제 팔뚝을 가볍게 쓸어내리는 동작― 흔히 추위를 느낄 때의 사람들이 자주 하는 행동, 그러나 그전까지 걸치고 있었던 셔츠는 간데없이 검은색 반소매 티 하나뿐인 차림을 보아, 셔츠는 모종의 이유로 훼손되어 버리거나 안 보이는 데 감춰 놓아야 하는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고, 관찰 가능한 모든 요소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최종 결론― 그의 해명 중 ‘계단에서’와 ‘굴렀다’ 중 어디에도 진실은 없으며 며칠씩 학교를 결석할 만큼 심하게 다친 데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으나 그는 진짜 이유를 밝히기를 꺼리고 있다.
이러한 결론을 바탕으로 르네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출력했다.
으이구, 조심하지··· 많이 아팠겠다.
#벤르네
그게 한 지난주쯤 있었던 일인데 크게 별일은 아니고. 저녁이나 같이 먹을 목적으로 만나서 무언가를 먹었다. 식당을 나와서는 르네가 가는 역으로 잠깐 걸었다. 따지면 서로 반대 방향이지만 크게 신경 쓴 적은 없었다. 한파주의보가 지난주에 왔던가, 그날이 좀 추웠던 것은 기억한다.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르네가 하도 추워 보이는 탓에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역 안으로 들어가길 재촉했다. 오늘 밤이 감기로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환승역인 탓인지 오가는 사람이 많아 복잡한 와중에도 한쪽 구석에 대충 자리를 잡았다. 잘 가. 조심해서 들어가. 그것 말고는 별로 할 말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말 대신 서로의 등에 손이 닿는 포옹. 평소보다 조금 더 길었다는 체감은 있지만 포옹을 풀 때 특별히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개찰구 아래로 보이는 계단. 르네가 그리로 내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하철 오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의 발소리. 계단을 가득 메우며 올라오는 사람들. 개찰구를 빠져나온 사람들은 열 몇 개의 출구들로 흩어져 사라진다. 출구를 통해 나가면 열 몇 개의 거리와 수백수천 개의 목적지. 어디인지 뻔히 아는 목적지 역에 내리면 너도 그들처럼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물리적인 이별은 그렇게 끝났고 어리숙한 감정은 과거로 남았다.
집에 돌아가서는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노트북을 켜서 쌓인 일을 하고. 적당한 때 잠을 잤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준비해서 외출하고. 가끔 걸려 오는 전화를 받는다. ―어, 왜. 응··· 어, 그렇게 됐어. 뭐? 무슨, 애도 아니고. 됐어. 네 걱정이나 해. 아,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진짜 뭐 엄마도 아니고. 끊어. 나 바빠.
그렇게 된 데 무슨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말하자면 문자 그대로 그냥이다. 인간사를 뒤져보면 생각보다 그런 경우가 많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다른 배경에서 태어나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갈 사람들임에도 어느 시기, 어느 한순간에 두 선이 교차하는 지점. 사실 곧게 뻗어나가는 두 선이 평행선만 아니라면 언젠가 한 번쯤은 교차하기 마련이고 우리도 그랬을 뿐이다. 우연찮게도 그 교차점에 우리는 같은 교실에 있었고 그 덕에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다는 착각을 일으키곤 했다.
교차점을 지난 이후로 멀어져만 가는 두 선을 억지로 이어놓는 건 미련에 불과하다. 각자 방향으로 가는 선을 붙들어 놓으려면 뻗어나가길 막거나 곡선으로 휘거나 둘 중 하나뿐이지. 나도, 너도 그러길 바라지는 않았다. 알면서도 미련을 청산하기까지가 조금 걸렸을 뿐이다.
나중에는 기분 좋은 그리움으로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베네딕투스라는 이름의 다른 약칭이나 좀 고민해 볼까 싶다.
조각글 커미션 작업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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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솦
인정할게, 그때 네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인과를 따지고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을 들인 지가 벌써 몇 년이다. 그렇게 사고하는 편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에 적합해서. 정념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줄이기 위한 내 나름의 시도. 정의를 설정하고 공리를 지나 증명에 도달하고··· 가지고 있는 정의와 공리를 잘 활용하면, 그 안에 꼭 문제를 풀 단서가 있거든.
오류의 발생 원인은 아마도 직전까지의 컨디션 난조와 사고할 시간의 부족.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본인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면 당황스럽잖아. 그게 무슨 생각이든 간에 말이야. 정의와 공리를 거쳐 증명까지 닿는 과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튀어나온 것은 원초적인 궁금증.
그리하여 최초의 오류 : 소피, 너는 수리과를 좋아해?
‘좋아한다’라는 표현은 어떠한 인과의 흐름과 의도의 전달에 있어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애매한 기준. 시작을 그렇게 해버렸으니 그 뒤로도 줄줄이 오류가 발생하는 게 뻔하잖아.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대뜸 질문함으로써 편하게 해결하려는 꼴이라니, 나답지 않지.
생각을 바꿔보라고! : 이건 두 번째 오류, 방금 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생각은 스스로 바꾸려 한다고 되는 게 아님을 나는 이미 알고 있어. 무엇보다 내가 산증인이지. 나 하나의 생각, 그걸 바꿀 수 있었다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야.
걸작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오류 :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을 위해서 네가 구를 필요가 없잖아!
자기모순과 부정적인 정념의 표출― 이는 높아진 목소리, 빨라진 말의 속도, 언쟁을 연상시키는 소음의 왕래로 표상되고.
인정할게. 난 네가 마음에 안 들었나 봐.
간절함도, 열정도 없어 보이는 네가 어중간한 마음으로 구르는 것 같아서. 갈 곳도 많고 받아줄 곳도 많은 인간― 굳이 이런 곳에 있을 필요 없는 인간이 선보이는, 어떠한 종류의 기만처럼 보여서.
그리고 돌아온 답변 : 나는 너희랑 친해지고 싶으니까.
내 오류투성이 질문들을 받아치기 위해 내놓은 너의 대답은 정론이 아닌, 똑같이 오류에 절인 답변. 어떠한 당위도 불가피성도 없이, 그저 우리가 떠드는 걸 지켜보는 게 좋다는 이유로 그렇게 뛰어다닌다고··· 말도 안 되는 오류잖아. 납득할 수 없는 종류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너를, 절대로···
잠깐의 침묵과 막의 전환을 알리는 나의 짧은 사과. 그리고 나는 네가 물었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자동 자판기처럼 내어준다. 토마스 홉스와 르네 데카르트 사이에 있었던, 뻔하고 재미없는 사연. 다 듣고 난 너는 무언가 단서를 잡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또다시 뛸 준비를 한다.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달려가는 너의 뒷모습이 복도 끝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고.
뚜― 하는 머릿속 사이렌이 울린다.
내 안의 익숙한 체계가 무너진다는 신호. 마음만 먹는다면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의 오만에서 비롯된, 무엇으로 다시 쌓아 올려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이미 너를 쫓아간 스포트라이트는 비어버린 학생회실을 비추지 않고.
그렇게 또 하나의 연극이 막을 내린다.
#벤르네
- 그냥 음료수가 더 맛있는 것 같아. 맛이 없는 건 아닌데, 뭔가··· 깔끔하게 맛있진 않아.
그래? 하며, 벤 스피노자는 술을 한 모금 더 홀짝였다. 과연, 르네의 말이 맞았다. 두 사람 모두 성인이라는 문턱을 이제 막 넘었을 뿐, 아직 새파랗게 어려서인지. 술을 오늘 처음으로 접한 그의 입맛 역시, 아직은 음료수를 더 선호했다. 다만 그 나이대 청춘들이 다 그렇듯, 그간 금지된 미지의 무언가에 거는 약간의 기대가 있었다고나 할까. 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길래 지금껏 금기시되어 온 것인지.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거나 생각보다 훨씬 시시하다면, 그들은 크게 실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르네는 이미 조금 실망한 것도 같기도 하고. 뭐, 어른이 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시시한 법이다. 벤은 그 사실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르네는 아직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는 기대를 놓지 못한 듯, 상당히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 술에 무지한 벤이 보기에도 위험해 보일 만큼 빠르게― 그 역시 무의식중에 르네의 속도를 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는 아직도 무슨 변화를 느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으로 반짝거리며 빛나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 그래서인지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지 못한 오늘, 아쉬움을 말하는 르네의 입술이 유난히 시무룩해 보이는 호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의 입꼬리는 늘 그렇듯 미소를 그리고 있었지만, 벤은 그 미소에 실망감이 담길 때를 잡아낼 수 있었다. 뭐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묘하게 힘이 없어 보이는 모양이라고나 할까···
···언제부터 입술을 보고 있었지?
단순히 어지럽다거나, 몸이 안 좋다든가 하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다. 단단한 지반 위에 자리한 이성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듯한··· 미약했지만, 그의 이성은 분명 무언가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살짝 들뜬 기분, 어쩐지 아무 말이나 해버리고 싶어지고. 이성이라는 거, 꼭 그렇게 기를 쓰고 지켜야만 하는 건가··· 이런 식의 오류가 무수히 떠올랐다. 르네가 알면 속상해할까? 우리의 이성은 생각만큼 견고하지 않으며, 고작 술 몇 잔 가지고도 이렇게나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 넌 아무렇지도 않아?
반쯤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말.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서, 술병의 성분표를 읽어보고 있던 르네가 한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응? 벤, 뭐라고?―코나투스 맙소사. 방금 그 말을 반복하라고? 그는 제 이성이 그만큼 취약한 상태에 처했다는 것을 거듭 알리고 싶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
- 벤, 피곤해?
- 아냐, 괜찮아.
이 대답도 어떻게 보면 비이성적인 상태에서 비롯된 오류―다른 말로 표현하면, 허세일까―일 것이다. 언젠가, 이성이 제 기능을 못 하는 상황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머리 굴리는 일이 유일한 장기인 그에게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막상 이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니, 그것은 생각만큼 불쾌한 감각은 아니었다. 약간은··· 꿈속을 걷는 기분 같다고 느낄 만큼.
그 이후로 르네가 슬슬 하품을 시작할 때쯤까지의 약 한 시간― 감각이 조금 먹먹하기는 했지만, 그는 큰 위기 없이 잘 버텨낼 수 있었다. 익숙해지니 술맛도 그리 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비록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살짝 휘청거리긴 했지만, 르네가 눈치채기 전에 중심을 다시 잡는 데 성공했다.
열한 시가 넘어 자리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누우니 그제야 세상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아버린 그는 감히 눈을 다시 뜰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르네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은 채로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르네는 곤히 잠든 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오늘따라 신이 나서, 혼자만 마구 떠들어 버린 기분이었다. 벤은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르네의 입을 빤히 바라보면서 즐겁게 그의 말을 들었고, 평소보다 더 많이 웃었다. 그 와중에도 르네가 실체이원론 이야기를 할 때는 동의하는 몸짓을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바로 반박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르네는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일어날 때 크게 휘청거린 건 덤이고.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철학 이야기를 할 때, 벤의 눈이 얼마나 총명하게 빛나는지. 그렇기에 르네는 벤의 눈동자가 흐리멍덩하게 풀리는 순간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게 사실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봐. 풀린 눈으로 나를 보는 너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더 행복하게 웃었지만, 내 눈에는 너무 낯설어 보여서. 평소와 같은 눈으로 돌아왔으면 해서··· 그래서 르네는 벤의 잔에 술 대신 음료수를 계속 채워주었다. 그를 향한 염려가, 르네의 눈을 빛내던 호기심을 눌러 이긴 순간― 벤은 알아봤을까.
모처럼 기분 좋아 보였는데 내 이기심으로 방해해서 미안해. 르네는 벤의 이불을 꼼꼼하게 잘 덮어준 뒤 잠자리에 들었다.
#파스페르
달그락, 하는 가벼운 소리. 페르마는 반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커피잔 옆에는 빛바랜 양피지가 몇 장― 그리고 그가 청년일 적부터 잉크를 갈아가며 죽 써오던 오랜 펜 한 자루.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 페르마는 그 틈새에 종이 한 장을 수식으로 가득 채우기를 즐겼다. 단순하게 생긴 것부터 아주 복잡한 것까지, 다양한 증명과 수식들··· 종이에 옮겨 적는 것은 극히 일부뿐이다. 나머지는 실체화되지 않은 채로 머릿속을 떠돌고 있다.
오늘은 그중 하나를 풀어보려 한다.
이 특별한 수식의 풀이 과정은, 가장 먼저 결론을 수식으로부터 분리해 깊은 기억의 수렁 속에 가라앉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비록 정방향으로 흐르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결론으로 향하기 마련이고― 수학자로서의 본능은 무의식중에 그 결론을 자꾸 찾는다. 이 복잡한 수식의 끝에서, 어떤 값이 결론으로 도출되었는가? 페르마는 제 생각을 결론에서 떨어뜨려 놓기 위해, 수식의 첫머리로 다시 돌아간다. 시작은 언제나 그 옛날의 리케이온 2학년 A반 수리과 교실이다.
너는 언제나 그렇듯 덤덤하면서도 두꺼운 자신감이 덧씌워진 표정을 짓고서, 노트에 표를 그려 보인다.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수수께끼를 내며 즐거워하는 아이처럼. 내가 내미는 노트에는 마찬가지로 너에게 보여줄 증명이 있고. 자, 이번 건 좀 어렵게 준비했는데. 어때? 너는 선선히 증명을 받아서 수식을 써 내려간다. 나는 네 수수께끼에서 모순점을 찾아낸다. 아, 이번에도 풀어버렸네. 흠, 설득력 있는 문제였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나 그런 결론. 둘만의 내기에 승자는 두 사람― 패자는 없고.
언젠가, 평소보다 확연히 간단해진 너의 답을 보고. 이 부분은 왜 비어 있어? 라고 물었을 때―너는 언제나 수식의 모든 부분을 꼼꼼하게 다 적는 편이었으니까―별로 어려운 부분도 아니고, 그 부분은 안 적어 줘도 이해할 수 있잖아? 네가 그렇게 처음 말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근데, 파스칼. 다른 데서도 이렇게 생략 해?
아니, 너하고 얘기할 때만. 이렇게 과감하게 생략해도 알아보는 사람 너밖에 없거든.
그런 대화가 오가던 정오. 교실 창문을 투과해 들어와, 그의 머리카락에 반사되던 햇살. 이제는 오직 페르마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그 광경― 그 한때의 순간들. 비통한 결론을 끝까지 외면할 수만 있다면, 그 찬란한 순간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어느 봄, 리케이온 수리과 교실에. 오로지 그 순간, 그 과정··· 그러나 파스칼을 둘러싼 모든 기억은 말년의 그가 고통 속에 요절했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었다. 결국은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인해 변색되어버린 과정들.
수학 공식이 결국 답을 향하는 것처럼 너의 인생도, 결과를 제외하고 과정만 떠올리기는 어려운 법이다··· 페르마가 간직하고 있는 파스칼에 대한 모든 기억― 그 모든 것이 기어이 죽음이라는 결론, 그 하나로 수렴해서. 숫자로 표현하면 0일까! 그 총명하던 천재 파스칼의 결론이 0이라니.
달그락, 하는 소리. 방금 것보다는 조금 더 무게가 실린··· 페르마는 더 털어버릴 것도 없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자, 다시 처음부터 검산. 결론은 0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지라도··· 과정에 담긴 무수한 숫자들은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 어디 보자, 네 인생은 7일 때가 있었다. 80일 때도 있었고. 256은 어떨까. 이런 순간에는 5만쯤 줘도 될 것이다. -15, 이런 순간도. -950··· 그럴 수도 있겠고. -122, -68, 4, -89···
그리하여 마침내 결론, 0으로 수렴한다.
어디··· 다 적기엔 역시 여백이 부족하군.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의 생략이라도 너라면 이해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