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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글내문] 파우스트 : 사랑이 시작된 순간순철논 2026. 1. 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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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순철논
#순정철학논고 #순철논 #짱논 #니체칸트 #닟칸 -파우스트 한 잔. 또 이 손님이다. 금요일 저녁에 찾아와 부러 도수 높은 술들만 마셔대며 스스로가 취하길 기다리는 사람. 취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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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 찹쌀떡(@rlazpzpz)님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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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 남자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짧고 편해 보이는 기장의 머리카락과 그에 어울리는, 적당히 날카로운 인상. 주로 방문하는 시간대는 금요일 저녁. 담담하게 술을 주문하는 음성은 그리 중후하지는 않지만 경박하지도 않은, 말하자면 소년티를 아주 다 벗어버리지는 않은 목소리··· 어지간히 술이 오른 듯 보여도 발음이 크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주문에서의 특이점은 매번 사십 도에서 오십 도 사이를 오가는 도수 높은 술을 주문한다는 것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주문하는 것은,
“파우스트 한 잔.”
이라고, 그가 말했다. 혹자는 그저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가 아니냐고 단정할지도 모르겠다. 글쎄, 사람 보는 눈이야 다들 다르니 ‘누가 봐도’ 따위의 표현을 쓰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그건 확실히 아니었다. 맛을 음미할 여유도 없이 벌컥이며 술을 들이켜는― 그저 알코올을 수혈할 뿐인 듯이. 아마 입에 털어 넣을 게 아니라 주사로 꽂을 수 있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듯싶다. 술이 오르면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선 무언가를 웅얼거리는 그러나 만만한 말 상대로 보일 법한 카운터 너머의 바텐더에게는 무언가를 묻지도, 푸념이나··· 사연을 읊어내지도 않는다. 조용하면서도 어딘가 눈에 띄는 사람.
대략 여기까지가 그간의 관찰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던 것들이다. 주된 방문 시간, 주문하는 메뉴, 생김새와 목소리, 알아듣기 힘들만치 작은 말로 웅얼거렸지만 용케 다 알아들은 그 나름의 사상들, 마지막은 좀 특이하지만, 그래도 손님으로서의 그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것을 다 알아낼 수 있었던 동안, 아직도 모르는 것들.
이름, 나이, 취미,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그리고
매주 찾아와서 독한 알코올을 부어 넣어야만 하는 내력은 무엇인지.
정리하자면 그 정도. 부족한 설명이지만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그럼 이만하면 서론은 됐고,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아마 조금 지루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들어주신다면 감사할 것 같아요.
“한잔하시겠어요?”
그렇게 물은 것은 어느 저녁이다.
바텐더가 손님에게 먼저 이렇게 묻는 게 어쩌면 조금 특이해 보일지도 모른다. 가게 입장에서는 아니겠지만, 혼자 바에 앉아 술 마시길 즐기는 손님의 입장에서라면야, 충분히 한가하고 무료할 법한 주말 오후··· 어때요, 약속이 없으시다면···? 그러나 그렇게 물으면서도 이미 상대에게는 잡혀있는 약속이 없음을 짐작하고 있다. 근거는 그간의 행적과 루틴, 나른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 근거로 내세울 만한 건 아니지만 직감과― 희망 사항? 그러니 손님, 괜찮으시다면 한잔하시겠어요, 제 말동무가 되어주시겠어요? 보편적인 관계― 보편적인 경우라면, 나오지 않을 법한 말이겠지. 그가 걸고넘어진 부분도 마침 딱 그 부분이었다. 말동무라면 그쪽이 내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틀에 박힌 세상만을 살아간다면,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지만 그는 대답이 없다.
침묵이란 묘한 것이라. 어떤 상황에서 긍정으로 해석되고 어떤 상황에서 부정으로 해석되는지― 계속 기다려보았자 알 수 있는 사실은 딱히 아니다. 그렇다면,
“그렇죠, 니체?”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 처음으로 이름을 알려준 그날, 취기가 적당히 오른 그는 니체라고 불러, 라는 말을 지루하도록 반복했다. 그리고 지겨운 반복 끝에 오늘의 이 대화로서 드디어 마침표를 찍듯이,
“프리츠.”
“네?”
“프리츠라고 불러.”
이번에는 내 쪽에서 대답이 없다. 할 말을 찾지 못했다기보단, 들은 말을 흡수하고 소화하는 데 걸리는 약간의 시간. 그러나 기다리다 못해 대답을 재촉했던 나와는 달리, 그는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프런트 바로 가서 이제 막 들어온 손님이나 된 듯이 자리에 앉는다. 그러고 있는 그의 모양새는 언뜻 긍정으로 보이는 듯하다. (주관이 가미된, 낙관적인 해석. 하지만 성급할지언정 그리 지나치지는 않은 듯한.)
“추천하는 거 있습니까?”
나는 한 손으로 턱을 짚고, 다른 손으로 팔꿈치를 지탱하고 섰다. 보통의 사람들이 고민할 때 취하는 보편적인 자세― 특히 이런 장소에 어울릴 법한. 괜히 고민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도수 높은 술만을 찾았을 뿐, 추천해달라는 말은 처음이었으니까. 추천이라··· 대답 없이 셰이커를 끌어오는 동안, 그의 시야가 내게로 향한다. 보드카 시트론 40ml, 쿠앵트로 15ml, 라임즙 착즙··· 아, 혹시, 신 것을 잘 드시나요?
“당신 입맛대로 해, 보편적인.”
짤막한 두 문장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간극. 뒤에 따라온 말은 아마도 계획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찰나에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그의 농담, 혹은 짓궂은 장난기라고 해야 할지.
마지막으로 크랜베리 주스를 따라 얼음을 담은 셰이커에 넣어 흔들어준 뒤, 칵테일글라스에 담아 내놓는다. 내 입맛에 맞춘, 이 공간 안에서 아주 보편적인 칵테일. 코스모폴리탄입니다. 무언가 덧붙일 설명 따위도 필요치 않은 듯하여, 나는 금방 입을 닫아버린다. 가게 안에 울리는 낮은 재즈 음만이 적막에 삼켜지려는 가게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음이 끊기는 순간 고요함 속으로 굴러떨어질 운명의,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공간 안에서― 그의 시선은 나를 슥 훑고선 제 앞에 놓인 칵테일로 향한다. 칵테일을 음미한다거나, 하다못해 잔으로 손을 뻗는다거나 하는 행동에서 발생하는 최소한의 소음도 없이,
“설명은 없나?”
뜻밖에도 말로서 깨어지는 적막.
“네?”
“뭐··· 유래라든가.”
그가 칵테일의 유래를 물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어느 날의 니체는 그가 항상 주문하는 술― 파우스트의 유래를 물어본 적이 있다. 실상은 그 이름을 알아내기도 전의, 어느 금요일의 일이다. 파우스트의 유래를 알고 있습니까?
“···네?”
“파우스트의 유래.”
무언가를 못 박듯 다시 한번 꽂혀 드는 질문. 얼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을 말한다. 괴테의 희곡 아닌가요? 분명히 대답을 들은 것 같은데도, 그는 들은 척을 하지 않는다. 의도적인 무시,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 하기보다는··· 조금만 기다리면 내 입에서 정답이 나올 줄 알고 있다는 듯이. 딱히 재촉하는 말은 없었지만, 어쩐지 기다리게 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 짧게 말을 이었다. 모르겠네요. 그 말을 뱉는 기분이 썩 유쾌했던 것은 아니지만.
“무지를 쉽게도 읊는군.”
쉽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성공한 셈이다. 손님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편안하게 들리는 화법을 오래 연습해 온 보람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제 할 말을 한다.
“파우스트가 계약하기 이전에 마신 술― 그리고 강한 도수와 다르게 달콤한 맛처럼, 악마와의 계약은 독하지만 그만큼 달콤하다는 뜻이 있지.”
그러니까 그때도 그랬던 것이다. 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구태여 질문하는 태도. 앎을 과시하려는 행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질문에 답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라면 그가 질문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는 문득 그의 눈을 바라본다. 그의 눈동자에 비쳐 보이는 나의 눈이 얇은 보랏빛을 띠고 있다. 구름처럼 떠오르는 수많은 말 사이로 손을 뻗어, 입 밖으로 낼 만한 단 하나의 완성된 문장을 쥐고 끄집어낸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연다.
“사실, 별로 특별한 건 없어요. 클래식 칵테일들의 역사를 비교해 봐도, 코스모폴리탄은 역사가 꽤 난해한 편에 속해요. 유력한 가설도 여럿이고··· 그중에 무엇 하나 정확한 게 없어서.”
“아무래도 좋습니다. 칵테일의 유래를 정확하게 아는 이가 어디 있겠어? 그쪽 목소리나 들으며 한잔하려는 것이니 그리 마음 쓰지 않아도···”
“제 목소리요?”
이유는 그것이었나. 미처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 구름같이 떠다니는 생각들 속에 숨어 있던, 손아귀에 잡혀 드는 단단한 무언가··· 그는 당황하는 낯도 없이 담담하게 답한다.
“가끔 사람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가 있지.”
“···아무튼, 판을 깔고 말하기에도 조금 민망하지만··· 그저 단골 손님이 바텐더의 새로운 칵테일을 마시고, 얼마나 세계적인가! 라는 말을 뱉은 것이 유래라고들 해요. 얼마나 세계적인가, How cosmopolitan··· 간단하죠?”
“그 이름 그대로 세계적인 칵테일이 되었고?”
“그런 의미로도 해석되겠네요.”
“좋군.”
“좋죠.”
그 뒤로 따라붙는 것은 작은 웃음소리. 끊길 듯 말 듯 이어지는 재즈 음 위로는 웃음이 흘러 들어가 마치 노래를 톡톡 튀게 만드는 일종의 포인트와도 같이 들린다. 그런 농담 같은 생각이 오가는 도중,
“임마누엘.”
들려오는 낮은 음정의 목소리를 기점으로 흐름이 바뀐다.
“감기라도 걸렸습니까? 얼굴이 붉은데.”
뺨으로 끌어온 손목을 잡아 내린 손아귀가 뜨겁다.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알코올에 잠식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의 체온. 약간 상기된 그의 뺨, 콧잔등, 눈두덩이나, 타인보단 조금 더 날카로운 눈매, 그 위로 길게 뻗은 속눈썹···
“아뇨, 아뇨.”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부정과 반쯤 본능적으로 해버린 뒷걸음질. 그런 무의식적인 행동에 대해 무슨 변명이나 하듯이,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콜린스 잔에 얼음을 넣어 냉수를 채워낸다. 그를 위한 작은 호의라는 명목에서다. 붉게 상기된 그의 뺨에 얼음을 가져다 댄다. (이것도 진정 호의라고 할 수 있나?) 순간적으로 놀란 듯 소스라친 그가 양미간을 살짝 좁혀 보인다.
“차갑잖아.”
“피곤해 보이셔서요.”
“그럼 좀 자게 놔두지 그래.”
“안 된다는 걸 아시잖아요.”
이쯤에서 그는 다시 잔을 들어 목구멍으로 액체를 넘긴다. 이야기를 듣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다지 관심은 없다는 듯한 제스처다. 멋쩍은 웃음이 나의 낯을 스쳐 갔는지, 그는 입술을 달싹인다.
“뭐 다른 말이나 해보든가.”
“다른 말?”
“다른 말.”
“예를 들면요?”
“그쪽이 좋아하는 거라든지.”
“···제가 좋아하는 거요?”
“그래, 그쪽이.”
“···목소리.”
칵테일에 대해서, 그리고 이상적인 말을 읊을 때, 묘하게 상기되어서.
“그리고···”
거짓을 읊을 때는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미세하지만, 잘게 떨리는 눈동자.
“···눈동자.”
너무 붉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은 색이.
“도수가 높은 술만 마시는 와중에도···”
그걸 버틸 재간이 안 되는 듯한 모습이.
“···남의 호의를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모습이나, 그러면서도 타인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 하는.”
그런 모습이,
“그만해.”
그는 갑작스레 구겨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그의 시선을 피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모습이 어색해 보이거나 갑작스럽지 않다.
“죄송해요.”
“사과하라고 한 적은 없는데.”
갑작스레 접은 눈가에, 늘어진 목소리에. 무엇 하나 사람을 놀릴 의지 없다고는 느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한 손으로 턱을 고정한 채 시선을 맞춘다. 눈빛이 따가워 시선을 돌리면 앞에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관찰력 좋네.”
“······”
“뭐 어쩌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
“···그쪽은 좋아하는 거 이야기할 때 목소리가 잔잔해서 듣기 좋아.”
“갑자기요?”
“의미 없는 잡음이라도 듣기는 좋아.”
“···그게 뭐예요.”
작게 웃음을 터트리니 그도 웃는다. 그것이 어떤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긴장이 풀어진다. 듣기 좋은 잡음이라. 그 말이 뇌리에 강하게 와닿는다. 방파제를 향해 쉬지 않고 달려온 파도가 강하게 몸을 부딪쳐서 제 모양의 자국을 남기듯이.
“칸트.”
그리고 또 한 번의 파도가 지금,
“기억합니까? 괴테의 희곡에서는··· 악마가 신에게 내기를 제안하지.”
언제나 악이 선에게 먼저 다가가. 선은 악으로 다가가지 않지만.
“내기를 제안하는 악마에게 신은 이리 말하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이라고.
“···반대로 생각한다면,”
방황하는 이는 무엇이 됐든,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방랑이 아닌, 방황이라면···”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겠지.
“길을 찾지 못한 것일 뿐.”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완벽한 길은 없고, 스스로가 개척자가 되어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결국 정해진 정답은 없는 거군요.”
“그렇지.”
“제 선택뿐이고.”
선택. 그 단어가 울리자 그의 눈은 시골의 반짝이는 밤하늘 별을 마주한 소년의 눈처럼 밝게 빛났다. 한순간임에도 눈에 가득히 담기는 그것을,
···이 시작된 순간이라고 생각했었어요. 하하, 역시 좀 지루했죠? 그래도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할 만하네! 무슨 이야기가 이렇게 길어.
하지만 분명히··· 잔잔해서 듣기 좋다고 했었잖아요?
듣기 좋은 말은 결국 사람을 잠 속으로 이끌지··· 일어나서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조차도.
그렇지만 지금은 자도 되는 시간이에요. 듣다가 피곤하면 잠들어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길다고 했지, 지루하다거나 잠이 온다고는 안 했거든, 네 얘기··· 잠이야 방금 다 깼고.
···어디 가세요?
내일 어차피 주말인데 그렇게 일찍 안 자도 되잖아. 그리고 배운 건 써먹어야지.
배운 것?
자, 자··· 편하게 앉아··· 한잔하시지. 손님, 뭐 마시고 싶은 건?
그럼 저는··· 파우스트 한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