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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에 대해 떠오르는 단상들― 셔츠 단추를 잠그지 않는 탓에 쇄골 근처에서 언뜻언뜻 흔들리는 목깃. 튀어나온 잔머리는 언제나 한 갈래로 가지런하고. 흰색 운동화는 보기보다 자주 더러워지고 자주 깨끗해진다.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남들 눈에 띄는 곳에서는 거의 읽지 않는다. 종합하자면, 그 애는 한껏 흐트러진 모습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습관인지, 아니면 일종의 병적인 강박인지는 모른다. 구태여 묻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르네에게 있어 그리 궁금할 법한 사실도 아니었다. 이미 그의 두뇌는 정답에 한없이 가까울 것으로 추정되는 형상을 추상적으로나마 멋대로 그려대고 있었다. 그림이 선명한 형체를 갖추는 데는 앞으로 단 몇 마디의 피상적인 정보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의 친구― 그 카테고리에 스피노자가 남들보다 더 빠르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친구, 그냥 그렇게 부름으로써 복잡한 관계망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르네 데카르트의 두뇌가 쉬는 건 아니었기에, 그저 기분만 내는 것뿐이었다고는 해도.
고등학교 삼 학년의 봄, 간단한 체육대회가 있었다. 하루 종일 의자에 엉덩이만 붙이고 사는 삼 학년들도 하루쯤은 땀을 흘리며 뛰어보자는 취지였다.
그런 식의 명목뿐인 행사가 다 그렇듯이 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줄다리기나 박 터뜨리기 같은 적당한 구색 맞추기용 종목들, 그리고 개중에서는 나름 야심 차게 기획한 미션 달리기와 마지막의 계주. 미션 달리기라는 거창한 이름은 아마 기획 측에서 처음 떠올렸을 때만 해도 놀랄 만큼 참신한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원래 아이디어란 실현 단계로 들어가기 전까지가 가장 빛나 보이는 법이니까.
미션 달리기의 골자는 코스의 중간에서 쪽지를 하나씩 뽑고, 쪽지의 내용에 해당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함께 결승선까지 달리는 것이었다. 이 간단한 규칙 때문에 기획을 맡은 학생회가 얼마나 골을 썩였는지 조금은 설명해 줘야 그들도 억울함이 덜할 듯싶다. 우선 그 ‘쪽지에 적힌 사람’이란 게 특정 누군가를 콕 집어 가리키는 경우― 일단 정확히 ‘그 누군가’가 아니면 오답으로 처리된다는 점에서 운을 심하게 탔고, 심지어 출전자가 인간관계에 어두운 위인이라, 쪽지에 적힌 사람이 누군지 모를 경우에는 완전히 낭패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사립 리케이온은 앎을 추구하는 태도를 높게 살 뿐, 모름 자체를 핍박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래서 다음으로 고안된 방책이, 특정인이 아니라 선수 자신이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을 적자는 안이었다. 이를테면 ‘나’와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마주친 사람― 요컨대 절대적인 고유성보다는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주관성을 내세우자는 말이었다. 썩 괜찮아 보이는 방향이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머뭇거리다가 한 손을 들기 전까지는. 저기, 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저 가장 가까이 있을 뿐인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서 우승한다면, 그것이 부정행위임은 어떤 방식으로 증명해야 하죠?
그쯤에서 이 낭만 가득한 기획이 실제로 구현하기에는 어딘가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모두가 깨달았으나, 이 말이 나온 시점에는 이미 체육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기에 다른 기획을 새로 구상할 수도 없었다. 별수 없이, 그들은 이 두 번째 안을 그대로 실행하기로 했다. 대신 미션 달리기는 그 승패의 중요성을 많이 낮추고, 우승자에게 소정의 기념품을 주는 정도의 번외 경기로 진행되었다.
이상이 르네 데카르트의 손안에 가장 친한 친구, 라는 말이 적힌 쪽지가 떨어지기까지의 지루한―대략적인 과정이다. 사실 그 정도면 그냥저냥 무난한 난이도의 쪽지였다. 앞서 기획팀이 걱정했던 대로, 아무나 끌고 간다고 한들 검증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는 점에서 더욱더.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르네 데카르트의 반응은 별로 기민하지는 않았지만, 고민하는 등의 몸짓으로 시간을 지체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핸드폰을 꺼내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있잖아, 어디야? 지금 이리로 올 수 있어? 아, 응, 그럼 그리로 갈게··· 하도 주변이 정신없었던 탓인지, 르네가 그 말을 끝으로 운동장을 벗어나는 걸 보며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르네가 찾는 이는 하필이면 운동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건물에 있었다. 동아리방이 모여 있는 건물이니 수공예부 부장인 그가 그곳에 있는 게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체육활동을 꺼리지도 않는 그가 어째서 체육대회에 불참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에 대한 무지가 의문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대신 르네는 한 손을 내밀며, 뛸 수 있겠어? 라고 물었다. 그 자신도 이때껏 뛰어오지 않았던 주제에. 그 뻔뻔스러움이 웃음을 불렀는지, 벤은 한바탕 크게 웃고서는 흔쾌히 그 손을 잡아주었다.
운동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래도 뜀박질하는 시늉이나마 했지만, 조금 그러다 보니 르네가 뒤처지기 시작했기에 속도를 통 올릴 수가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니 폐가 약한 벤도 뛰기를 슬슬 꺼리면서, 언젠가부터는 그냥 산책하듯이 걷고 있었다. 쪽지에 적힌 사람을 ‘데려온다’는 명목으로 이어진 손과 손은 여전히 꼭 맞닿은 채였다. 그야 아직 결승선에 도착하지 않았고, 그렇다는 것은 손을 놓을 이유가 눈앞에 닥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꼴찌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명의 소외도 용납하지 않겠다 선포한 당시의 학생회가 끝까지 기다려 준 덕분이었다. 그들은 어찌저찌 결승선을 지나고 나서야 땀을 닦으며 실컷 웃어젖힐 수 있었다.
- 생각해 보니까 바로 옆에 라이도 있었는데!
- 아하하, 그러게. 그냥 아는 얼굴 아무나 데려가서 가장 친하다고 우기면 되는 일이었잖아.
- 마음이 급해서 그런가··· 너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
학생회 후배가 내민 물을 마셔가며 즐겁게 웃고 나니, 문득 이것이 아무리 번외 경기라지만 엄연한 상품이 걸린 경주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꼴찌도 겨우 해낸 시점에서 상품과는 연이 없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르네는 별 뜻 없이 가볍게 물어보았다.
- 근데, 이거 1등 하면 뭐 좋은 거 있어?
- 어, 간단한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어요. 학생회 차원에서 수공예부의 협력을 받아 만든 기념 열쇠고리인데···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음은 물론이다.
- 그래서 거기 있었구나.
- 달리기 상품은 벌써 다 만들어서 넘겼지··· 난 애들 줄 거 만드느라 늦었고.
- 어? 그럼 그건 어디 있어?
- 동아리방에. 안 그래도 한창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 말을 하지!
- 아니, 중간에 나오는 게 뭐 딱히 어렵진 않으니까···
소소한 이야기를 떠들면서 동아리방으로 돌아가는 길― 벤 스피노자는 그 길을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미 뚜렷해진 형상을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라는, 그런 불편함을 처음으로 강하게 느낀 것이 그때였기에. 너무 늦은 거 아닌가? 그런 자조적인 생각마저 드는 시기였다. 고등학교 삼 학년의 봄― 서로에게 서로뿐일 수 있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복잡한 기분을 무마하기 위해, 그는 그 관계를 마지막까지도 줄곧 친구라고 불렀다. 그저 달래는 기분만 내는 것뿐이라고는 해도··· 흐트러진 모습이나마 일관되게 유지할 이유는 충분했다. 밖에서는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아지트에서야 많이 읽는다곤 해도. 운동화를 자주 세탁하는 이유는 그만큼 자주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머리를 묶으면 튀어나온 잔머리는 언제나 한 갈래로 가지런하게 내려온다. 하늘거리는 목깃이 가끔 거슬릴 때가 있어도 셔츠 단추는 채울 생각이 없다― 그 아이가 떠올릴 단상들, 네게 변함없는 안정감을 가져다줄.'순철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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