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르네 데카르트는 자연스럽게 잠에서 깼다.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지금이 충분히 이른 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평소 같았다면 이불을 끌어안고 삼십 분쯤 더 꾸물거렸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만큼 몸이 개운했다.
오랜만에 좋은 컨디션을 굳이 낭비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는 바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얼굴에 마구 물을 끼얹으며 세수하는 동안 느낀 기묘한 이물감을, 그때까지는 어렴풋이 감각만 할 뿐 뭐라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세수를 마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듯이,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고.
익숙한 갈색 눈동자를 보고야 말았다― 다른 것도 아닌, 바로 제 얼굴을 비추고 있는 거울 속에서. (익숙하고, 또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절대 르네 데카르트의 것은 아닌 그 눈동자)
“···응?”
하필 그 타이밍에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버리는 바람에, 충격적인 상황은 더 빠르고 직관적으로 뇌를 강타했다. 이미 눈앞의 광경을 부정하느라 바쁜 눈보다 귀가 먼저 반응했다. 이건 벤 목소리잖아. 그다음에야 거울 속에 비친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의 모습이 찬찬히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인상은 생각보다 더, 그 사람이 짓고 있는 표정이나 인상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렇기에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거울 속의 얼굴은 평소 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얼굴이 벤이 아닌 건 아니잖아? 그렇지만 벤이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벤은 저기 있는데?
더 깊은 데로 생각이 흐르기 전에, 르네는 벤이 자고 있을 침대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들춰본 이불 아래에는 곤히 자고 있는 르네 데카르트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르네 데카르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저것이 벤이고, 나는 지금 벤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르네는 반사적으로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행동을 하려다가 이것이 벤의 머리카락임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침착해, 침착··· 진정해! 비록 합리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물론, 르네가 쉽게 침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확히 그 이유 때문이기는 했다. 세상에, 인간의 이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도 미처 다 파악할 수 없는 현상이 대체 어디에 있어! 이 시대의 형이상학은 이런 상황까지도 해명할 수 있을 만큼 발전한 것이 맞나?
다만, 언제나 데카르트가 가진 최고의 방패이자 검은. 나는 존재한다. 생각하고 있음이 그 명확한 증거. 이 상황의 그 어느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단 한 가지 의심 불가능한 확고한 진리.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기에 흔들리지 않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단 하나의 주춧돌, 그렇기에 안심하고 그 위로 무엇이든 쌓아 올릴 수 있어. 진정해, 르네 데카르트. 이게 어떻게 된 일이든, 나는 존재한다. 그것만은 확고 불변한 진리야. 그거면 됐어, 일단, 그거면 된 거야!
좋아, 진정했다.
어쩌면 뇌가 모종의 착각을 일으켜서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없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으니) 상황에 직면했는지도 모르지. 뇌는··· 뇌는 지금 내 것이 맞나?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확인해 보고 싶은데? 해부해 볼 수도 없잖아! (그는 잠시 누워 있는 제 몸을 바라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일단 벤을 깨울까? 둘이서 머리를 맞대면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나을 테니. 그러나 르네는 곧 떠올렸다. 차마 셀 수도 없을 만큼 무수한 날들, 룸메이트인 벤이 자신을 깨우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비폭력적인 수단 내에서, 벤은 그간 르네를 깨우기 위해 온갖 방법을 종류별로 다양하게도 시도해보았다. 간지럽히기 공격을 한 적도 있었고― 르네는 곧 익숙해져서 간지럼에 면역을 갖추게 되었다. 깜짝 놀랄 만한 말을 귓가에 속삭인 적도 있었고― 결과적으로, 르네는 벤이 오전 11시 이전에 하는 말은 그 무엇이든 믿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에는 이마에 입술이 와 닿은 적도― 딱 하루, 그것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다만 그날 이후로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잠에서 깨 본 기억이 없다. 벤, 요즘은 왜 아침에 그거 안 해줘? 르네가 그리 물었을 때 되돌아온 벤의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고? 야, 내가 거의 맨날··· 아니다···
르네 본인의 몸이기에 더 확신할 수 있었다. 르네 데카르트의 육체는 적어도 오전 11시는 지나야 잠에서 깰 수 있는 약간의 가능성이나마 생길 거라고. 아마도 그게 맞는 가정인 듯, 르네의 몸에 들어가 있는― 벤으로 추정되는 그는 오전 10시를 넘긴 시각인데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평소의 벤이라면 이미 일어나서 씻고, 옷 갈아입고, 아침 챙겨 먹고, 나갈 준비를 싹 마친 채로 느긋하게 앉아서 책 한 권을 집어 절반이 넘도록 읽고 있을 시간인데도.
예상대로 오전 11시가 다 되어서야, 벤―르네의 모습을 한―이 눈을 떴다. 그의 움직임을 감지한 르네가 즉시 누워 있는 그의 위로 얼굴을 들이대며 벤의 이름을 불렀다. (이때 벤이 얼마나 놀랐을지, 르네는 나중에야 천천히 생각해볼 수 있었다)
느긋하게 두어 번 깜빡인 초록색 눈이 다시 눈꺼풀 틈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는 꾸물거리며 르네에게 등을 보인 채로 돌아누운 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벤, 일어나 봐. 나야, 르네야.”
“···르네?”
졸음이 가득한 눈을 한 채로, 주섬주섬 일어나 앉은 벤이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르네―벤의 모습을 한―를 보았다. 생각이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르네는 벤이 지금 어떠한 사고의 과정을 거쳐서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조금 궁금했다. 이따가 진정하면 물어봐야지.
“벤, 많이 당황스럽겠지만···”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벤―그러니까, 르네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놀란 르네가 그를 일으키려 다가간 순간, 정확히 목을 노린 손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순식간이었지만, 르네는 반사적으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가 그의 가냘픈 손목을 잡아서 저지할 수 있었다. 그 일은 아주 간단한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터무니없이 쉽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체격 차이가 났던가?
“야, 넌 뭐야?”
“벤, 진정해! 나야, 나 르네야.”
“말도 안 되는 소릴―”
다음 순간, 벤이 말을 뚝 끊었다. 아마도 그제야 눈앞에 있는 제 모습 말고도, 자신이 움직이고 있는 몸이 누구의 것인가가 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나, 왜··· 어떻게 된 거야?”
“어···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일어나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
르네가 벤의 얼굴로 헤헤, 실없이 웃어 보였다. 그 표정을 보고서야 르네의 얼굴로 한껏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벤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방금을 기점으로 벤은 지금 제 몸을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 르네라는 것을 확신한 듯했다.
제 것보다 훨씬 작은 르네의 손도 내려다보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도 한 번 헤집어 본 벤이 드디어 상황 파악을 완전히 마친 듯,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아침에 일어난 기이한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쨌든 학생이었기에 학교를 갈 의무가 있었다. 졸지에 벤까지 오전 수업을 빠지게 됐지만, 원래도 종종 결석하곤 했으니 그리 중요한 점은 아니었다. 벤이 르네의 교복으로 옷을 갈아입는 동안, 르네는 벤의 교복을 찾아 방을 뒤지고 있었다.
“벤~ 네 셔츠 어디 있어?”
“지금? 빨았지.”
“조끼랑 마이는?”
“안 샀는데?”
“···그럼 나 뭐 입어?”
다음 순간, 눈앞으로 검은색 반소매 티가 날아왔다. 벤이 르네에게 뭘 건넬 때 던지는 식으로 해결한 것도 처음이었지만, 르네로서는 자신이 그것을 한 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잡은 게 더 신기했다. 얼떨결에 옷을 잡아낸 르네가 멍한 표정으로 벤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벤이 교복이랍시고 옷을 갖춰 입은 결과가 어떤지를 확인했다.
“그러고 나갈 거야?”
“문제 있어?”
많아 보이는데. 벤은 교복 셔츠를 대충 꿰어 입기만 했을 뿐, 넥타이나 조끼, 마이 중 그 어느 것도 챙겨 입지 않은 상태였다. 그 덕에, 그의 모습은 모종의 사유로 인해 한껏 비뚤어지기로 마음먹은 르네 데카르트쯤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르네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 넥타이라도 하는 건 어때.”
“그게 제일 답답한데.”
넥타이 착용 여부를 두고 한참 실랑이한 끝에, 결국 항복한 벤이 못 이기겠다는 듯 웃으며 르네에게로 손을 뻗었다. (아마도 습관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동작을 취한 것 같았지만, 그의 손은 잠시 허공을 어색하게 헤매다가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자신도 약간 뻘쭘했던지, 뒤돌아서 서랍을 뒤적거리던 벤이 다른 화제를 꺼냈다.
“와서 여기 앉아 봐. 머리 묶어줄게.”
그때까지도 머리카락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던 르네가 아, 하고 뭔가 깨달은 듯한 소리를 냈다. 벤은 항상 머리를 묶고 다녔지. 엉킨 곱슬머리를 빗으로 빗어낸 벤이 (자기 머리를 뒤에서 바라보며 빗겨준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능숙하게 모아서 하나로 묶었다.
“으음~ 남의 머리 묶어준 적이 없어서 그런가··· 깔끔하게는 안 묶이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누군가 머리를 만져주는 손길에 잠이 와서인지, 잠깐 눈을 감고 있던 르네가 눈을 반짝 뜨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학교에서 늘 보는, 르네가 가장 잘 아는 벤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아~ 이제야 벤 같다! 이대로 학교 가도 아무도 못 알아보겠는데?”
벤은 르네의 환한 미소를 그대로 머금은 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렇게 사소한 일에도 행복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그 자신의 얼굴도 저런 표정을 지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마도 있었을 것이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언젠가.
그에 반하면. 그는 시선을 들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르네 데카르트의 얼굴은 웃는 표정임에도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마침 르네가 말을 걸었기에 대답하면서 평소처럼 씩 웃어 보였지만, 적어도 르네의 얼굴에 어울리는 미소는 아니었다. 물론, 제 얼굴이었다면 표정이 어떻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벤이 르네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저기, 르네. 우리 오늘 그냥 학교 가지 말까?”
평소처럼 자신감으로 반짝이며 빛나지 않는 르네 데카르트를 누구 앞에 내보일 수 있다고.
“응? 나야 뭐 괜찮지만··· 안 가도 괜찮겠어?”
“에이, 나 원래도 잘 빼먹었잖아. 그리고 오늘 같은 날까지 학교 꼬박꼬박 가봤자 좋을 게 뭐가 있어? 귀찮은 일만 잔뜩 생길걸. 오늘 하루는 그냥 쉬는 셈 치고 놀자.”
아지트로 옮겨도 되고, 그냥 기숙사에 있어도 되고. 간식 좀 사서 들어올까? 어때. 그가 활기차게 내뱉은 말에도, 르네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이제야 바탕에 좀 어울리는 표정이구나.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있었던 듯, 한참이나 망설이던 르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벤, 그러면 이렇게 된 김에··· 밖에 나갔다가 올래? 나 기숙사에 있을 테니까. 지금이라면···”
“······”
“···아, 그,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그냥, 혹시··· 혼자라도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을까 해서··· 아니야, 미안.”
영원과도 같은 몇 초간의 적막이 지나갔다. 벤은 지금 제가 르네의 얼굴에 어떤 표정을 띄우고 있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단지 벤의 눈에 비친 르네는 굉장히 미안해하는 듯한 표정을 그의 얼굴에 띄워놓았을 뿐이다. 아주 송구하다는 듯, 감히 못 할 말을 했다는 듯,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을 했다는 듯, 마치 네가 죄인이라는 듯이!
···보기 싫다.
“됐어. 널 두고 내가 혼자 어딜 가. 갈 데도 없고, 가고 싶은 데도 없어.”
“···벤.”
“아, 오랜만에 학교 빼먹는 날인데 왜 이렇게 우울한 분위기야? 얼른 매점 가자. 간식 파티해야지!”
그날 오후는 벤의 말대로 즐겁게 지나갔다. 매점에서 사 온 간식을 까먹으며,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서로의 얼굴로 우스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내 얼굴 막 쓰지 마!―마치 그들만을 위해 오늘만 특별히 주어진 이벤트처럼··· 그리고 실컷 웃고 떠들다가 쓰레기를 다 치우지도 않고 둘 다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뜬 벤 스피노자는 익숙한 제 몸으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당연하게도― 이제까지의 많은 밤이 그래왔듯, 르네는 그의 허벅다리를 베개 삼아 누운 채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어쩐지 다리가 저리더라니.
르네의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줌을 손가락으로 슥 밀어서 한쪽으로 치운 뒤, 그는 드러난 르네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좀 더 자, 이따 깨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