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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 오는 날 벤솦
    순철논 2025. 12. 10. 16:50


     사람을 굳이 둘로 분류하는 이분법의 논리. 충분히 식상하고 또 조금은 우습지만, 어쨌든 세상 사람을 나름의 기준에 따라 두부 자르듯 반으로 나눈다면, 누군가는 이런 기준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가 오는 날에만 우산을 챙기는 사람과, 일 년 내내 우산을 가방에 챙겨 넣고 다니는 사람. 한지혜는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자였다가, 시간이 흐르며 후자로 옮겨왔다고 해야 하겠다.

     평생 쌓아온 경험과 기억― 지금의 한지혜를 구성하는 것 중 어떤 조각이 그런 사소한 변화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른다. 그냥 아무런 예고도,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에도 대비할 수 있으면 좋으니까.

     어떤 종류의 갑작스러움이든

     지수가 사라졌어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지만,

     가야 해요

     기왕 살아가면서 그런 충격과 마주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떤 소식이 들려와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당황해서 정신없이 뛰다가는

     ···어르신이 하시는 현학자 놀이보다 더!

     넘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장마철인지 햇빛이 영 들지를 않는다. 지난 며칠간은 그래도 비는 안 온다 싶었는데,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을 보아하니 오늘은 그냥 보내주지 않을 듯싶다. 비 소식이 있었던가? 예보 따위는 확인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어차피 이제는 늘 우산을 들고 다니니까··· 소피는 하늘에서 떨어진 물기를 느끼고 손을 앞으로 뻗어보았다. 간단한 동작에 화답하듯, 바로 손바닥에 물방울 하나가 톡, 떨어졌다. 얼른 우산을 꺼내어 쓰고 나니 아직은 한두 방울뿐인 줄 알았던 물방울들이 우산에 부딪혀 톡톡 튀는 소리가 명쾌하게 울렸다. 늦지는 않은 모양이다.

     왜 진작 이렇게 할 생각을 못 했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끔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에 당황해서 마구 뛰어다니거나, 편의점에서 싸구려 우산을 급하게 사서 집에 쌓아두던 기억들이 어렴풋이 떠올라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비 때문인지 거리는 한적했다.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저 앞에서 누군가의 뒷모습이 우산도 없이 걷고 있는 게 보였다. 평소 걸음걸이대로 걷다 보니 그와의 간격이 조금씩 좁혀지면서, 소피는 그 사람을 금방 알아보았다. 이 학교에 그 정도 머리 기장을 가진 학생은 많을 테고 요즘은 옷차림도 그리 특징적이지는 않았지만― 직감이라고 할지,

     난 심리상담 같은 거 필요 없어

     아니면 저 할 말만 하고 돌아서던 그 뒷모습이 기억 한편에 남아 있어서인지.

     그 사람이 벤 스피노자임을 알아봄과 동시에 문득 그런 불화의 기억까지 같이 떠올라 버렸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지만, 그게 그들 사이에 오간 마지막 대화였다는 것도. 간격은 어느새 스무 걸음 정도로 좁혀져 있었다. 원래 걸음이 저렇게 느렸나? 우산을 쓰지 않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비였음에도 그는 걷기를 별로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정면에서 얼굴을 확인한 것도 아니고, 뒤통수만 보고 알아본 사람을 굳이 쫓아가서 붙들고 인사하려면 얼마나 친해야 하는 거지. 본래도 그리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었기에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그 전에··· 친하다고 말할 수는 있나? 이제는, 혹은 그전에도?

     망설임에 붙들린 소피의 등을 떠밀듯이, 우산에 와 부딪는 빗방울의 마찰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하, 소피는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거친 날숨을 짧게 내뱉고는 마음을 굳힌 듯이 걸음을 서둘렀다.





     머리카락을 적시던 비가 어떤 전조도 없이 멎었다. 기세를 봐서는 그렇게 갑자기 그칠 리 없는 비였는데.

     더 이상 머리 위로 물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생각되어서,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짙은 색의 우산에 반쯤 가려진 하늘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말도 없이 대뜸 우산부터 들이댈 만한 사람이 누구일지, 머릿속에 당장 떠오르지는 않았다. 최소한 이름이라도 부르거나― 아니면, 그가 비를 맞든 말든 무시하고 지나갈 것 같은 사람들의 이름이 소거법으로 하나둘씩 지워졌다. 자, 그럼 남은 사람은···

     소피?

     누군가가 우산을 씌워주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그 이름이 발걸음을 돌려세웠다. 예상대로, 소피가 떨떠름한 (그러나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내키지 않음’과는 무언가 다른) 표정을 한 채로 우산을 그에게 씌워주고 있었다.

     “···이거 써.”
     “아, 고마워. 그럼 같이···”
     “나는.”

     단호하게 내뱉어진 그 두 음절이 마치 달리기 시합 직전의 준비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소피는 한쪽 발을 뒤로 살짝 빼며 뛰어가려는 (다른 말로 하자면, 도망가려는) 것 같은 태세를 취했다.

     “뛰어가면 금방이야.”

     그 말을 끝맺자마자 정말로 뛰려는 소피의 팔을, 벤은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운동회에서 소피의 활약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지만, 그래도 소피가 진심으로 뛰기 시작하면 못 잡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갑자기 제동이 걸리는 바람에 소피가 덜컥 멈춰 섰다. 생생하게 전해지는 급제동의 충격에, 그는 황급히 손을 놓았다. 그의 손아귀에 붙잡혔던 소피의 팔과 제 손 사이로 불안한 시선이 빠르게 오갔다.

     “미안.”
     “어···”
     “···그냥 같이 쓰고 가면 되잖아.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그러니까! 멀지 않으니까, 나는 뛰어가도 괜찮···”
     “그렇게 불편해?”

     아차. 그가 이미 나가버린 말을 뒤늦게라도 막아보려는 듯, 재빠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한― 당연한 말을, 뻔뻔하게―)

     “···미안.”
     
     그가 언뜻 무의미하게 들리는 음절을 반복했다. 여전히 두 사람의 머리 위를 가리고 있는 우산을, 그는 우산대에 손을 얹고 소피 쪽으로 가볍게 밀어주었다. (손잡이를 건드리자니, 소피의 손이 그 자리에 있어서)

     “그냥 네가 써, 우산.”
     “너는?”
     “가방에 있어. 지금 꺼낼게.”
     “···그럼 왜 안 쓰고 있었는데?”
     “그냥, 귀찮아서?”

     그가 오랜만에 빙글 웃으며 답했다. 올라가는 입꼬리가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우산을 하나씩 쓰고 나란히 걷던 중에, (적당히 일행으로 보이면서도, 소피 입장에서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을 거리감) 소피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우산은 항상 챙겨 다니는 거야?”
     “언제 소나기가 올지 모르잖아.”

     그렇구나. 소피는 명확하게 동의하지 않고 애매한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이후로 끊긴 말소리의 공백이 쏟아지는 빗소리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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