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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유혈, 신체 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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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단에 속하든, 실력보다는 눈치와 꼼수가 먼저 늘기 쉽다. 한지혜 역시도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 거 없이 정직하게 경험치를 쌓아서, 완전히 자기 실력만으로 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어, 뭐 대단한데, 인정하는데, 그렇게 단단하지 않은, 나같은 사람은 귀찮은 일에 정면으로 머릴 박을 게 아니라 적당히 피해 가면서 살아야 한단 말이야. 특히 사방이 귀찮은 일 천지인 이 학교에서는 조상님이 가끔 켜주는 머릿속의 레드라이트를 최대한 신뢰할 필요가― 어,
소피의 느긋한 걸음걸이가 별안간 뚝, 멈춰 섰다.
뭐가 오고 있길래 예감이 이따위지?
사람의 직감이란 제법 신뢰할 만하긴 하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없는 단순 느낌에 불과하니 그것에 너무 휘둘리거나 불안해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소피는 명백히 당황하고 있었다. 레드라이트 수준이 아니라 조상님 다섯 명쯤이 꽹과리를 휘모리장단으로 두드리며 강강술래를 하고 있어서 그럴지도. (이 근대-서양-철학자 놈들은 이렇게 말해봤자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도 모르겠지!)
도망쳐야 해. ···어디로? 뻣뻣한 동작으로 몸을 돌린 순간, 소피는 냉장고 비슷한 무언가와 정면으로···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럴 뻔했다고 생각될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만을 사이에 둔 채로 학생회장 토마스 홉스와 마주쳤다― 상냥해 마지않는 미소를 짓고 있는.
“소피아 양? 시간이 괜찮다면, 협조를 구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
···그래, 뭐, 사실. 조용히 넘어갈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으니까. 소피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폭발의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사고가 나는 건 한순간이라. 원인 또한 명확하지 않았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원인을 찾는 데만 함몰되어 결과를 외면하는 것은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말했지만, 소피는 만약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만약 어떠했다면··· 식의 가정은 후회할 게 있는 상황에나 하는 것이고. 후회가 드는 상황이라면 이미 늦은 셈이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발음이 실험실을 뒤흔들었다. 소피는 자신이 반사적으로 소리라도 질렀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놀란 것뿐 타격은 없었음에도, 소피는 휘청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폭발음이 들린 곳을 중심으로 해서 반경 몇 미터쯤의 공간이 우그러지는 듯한 착각. 몇 초인지 모를 순간이 지나고, 자욱한 연기 사이로 언뜻 보인 실루엣이 소피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피와 섞인 듯한, 알 수 없는 액체가 테이블 위를 흐르다가 바닥으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폭발을 가장 가까이에서 맞이한 베이컨의 오른손은 살짝 부풀어 오른 장갑에 감싸여 있었기에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단지 너덜너덜한 장갑 끄트머리에 뭔지 모를 끈적한 액체가 떨어지지도 않고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베이컨이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던 소피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짧게 음, 하고 언뜻 만족스럽게 들리는 소리를 냈다. 그제야 소피가 제 옷을 확인해 보니, 폭발의 여파는 한 방울도 소피에게 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 제 손으로 시선을 돌린 베이컨이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조수! 왜 멍하니 있어? 얼른 가위 이쪽으로 줘야지! 장갑을 잘라내야 할 거 아니야?”
“···도와줄 사람을 부르는 게···”
“아니지! 사람을 부르면 어떡해. 내가 이 학교에서 사고를 더 쳤다가 무슨 꼴이 될 줄 알고? 잔말 말고― 가위 줘, 이리. 얼른!”
“······”
“역겨우면 나갔다 와도 되는데, 그 전에 가위 좀 이쪽으로 던져주는 게 어렵진 않잖아?”
소피는 최대한 정면으로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곁눈질로 그의 손 상태를 살폈다. 검붉은색의 무언가가 작게 찰박,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무슨 약품과 피가 섞인 건지 몰라도, 속을 뒤집어 놓는 악취가 서서히 실험실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다친 사람 앞에 두고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생리적인 구역질이 목 안에서 꿈틀거렸다. 소피는 다시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속 안 좋으면 나갔다 오래도?”
“이 상태로 두고 어떻게 나가?”
“음~ 음,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눈앞에 있는 현상을 외면하지 않는 것도 훌륭한 학자의 자질이지. 그럼 마음 편하게 하나만 더 부탁할까? 이 가운 벗는 것 좀 도와줘. 이걸로 지혈하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아서― 오래 잘 입던 거지만 어쩔 수 없지.”
피가 엉겨 붙은 장갑을 잘라내는 건 꽤 고역이었다. 소피는 만약 가위를 들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떨다가 손가락이라도 하나 잘랐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베이컨이 능숙한 솜씨로 장갑을 잘라냈지만, 상처에 달라붙어서 도저히 안 떨어지는 조각은 일단 그대로 놔둬야만 했다. 손등부터 팔을 타고 피부를 얽어가듯 올라온 상흔이 제법 넓었다. 실험용 가운을 벗으니 드러난 교복― 가운을 입지 않은 그의 모습은 상당히 낯설게 보였다.
“자, 됐어. 이제 가. 보면 알겠지만 오늘 실험 공쳤거든. 아~ 조수 생긴 김에 조금 더 오래 부려 먹고 싶었는데. 너 일복 좋은 편은 아닌가 봐?”
이 괴짜학교에 취업 당했으니 일복 자체는 좋은 편이지 않을까? 소피는 난장판을 두고 나오는 것이 약간 찝찝하면서도, 당장의 급한 처치는 끝냈고― 무엇보다 도와줄 사람을 부르면 더 곤란해질까 봐, 별말 없이 나와서 문을 닫고
조용한 복도에 토마스 홉스의 발소리만이 위압적인 무게를 가지고 울렸다. 어쩐지 소피아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을 이성적인 상태에서 매끄럽게 끝맺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로 면담을 마무리하고 소피아를 돌려 보냈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어느새 복도를 걷고 있었다.
느슨한 밀도로 공간을 채우고 있던 적막이 걸음마다 깨져 달아났다. 고요함이란 단지 소리가 없는 상태를 가리킬 뿐이라, 실험실을 향해 걷는 것만으로도 무참히 파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가볍게 깨뜨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홉스는 부재함의 기본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편이었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즉시 침묵이 퍼져나간다. 빛이 없는 곳에는 어둠이 공간을 집어삼킨다. 온기가 물러간 자리에 냉기가 도사린다. 권력이 없는 곳에 끔찍한 혼란이 들어앉는다. 그러한 사태를 방지하려면, 소리는 쉬지 않고 공간을 채워야 하며 빛은 한 줄기라도 살아남아 어둠 속을 밝혀야 하고 온기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권력은 나누어지지 않고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자리를 비우면 무섭도록 무의 상태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그것들이 대단한 힘이라도 가진 것처럼 말하지만, 결국 기본의 상태에 해당하는 침묵과 어둠과 냉기가 들어설 틈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아야만 하는 것들이다.
끊임없이, 끊기지 않게 관리하지 않으면 그 틈새로 무섭도록 들어차는.
홉스는 그 틈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당신에 대해서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홉스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범위에서 행동할수록, 그는 절대적인 권력의 부재를 표상했다. 토마스 홉스의 살아 움직이는 약점이 그런 식으로 마구 설치고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그를 어쩌지 못한 것은 옛날의 그 낡은 상하관계에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홉스가 매여 있는 탓인지도.
끝없이 이어지던 발소리의 종결보다,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미세하게 더 선행되며 소리가 겹쳤다. 난폭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프랜시스 베이컨이 돌아보았다. 좋은 말로 할 때는 반도 채 돌아보지 않던 그 뻔뻔한 고글이― 기어이 당신도 이런 폭압적인 방법만이 통하는 상대인가?
말도 없이 잡아챈 오른팔이 위쪽으로 휙 들추어진다. 들고 있던 플라스크가 손에서 미끄러지면서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가, 천천히 굴러 바닥으로 추락한다. 바닥에 닿는 순간에야 쨍, 하는 소리가 짧게 울린다. 홉스는 그 소리의 여음이 완전히 잦아들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장갑, 벗어보시죠.”
베이컨의 시선이 붙잡혀 있는 제 팔에 가 닿았다가, 느릿하게 다시 홉스를 향했다.
“실험 중에? 농담이 지나쳐, 홉스.”
다만 침착한 어조 위로 덧씌워지는 약간의 불쾌함이. 홉스는 그것을 완전히 무시했다.
“실험이 중요합니까?”
“그럼 뭐가 중요하지?”
“당신이 직접 말해보는 게 좋겠군요. 그 정도의 부상을 비밀에 부쳐야 할 만큼이나 더 중요한 일이 뭐가 있었는지.”
“비밀이라.”
비밀, 무심하게 그 단어를 중얼거린 그는 뭐에 꽂혔는지(하) 제법 유쾌한 기분이 되어 비밀이란 말을 입안에서 굴려 보는 듯했다. 또 뭐가 문제입니까? 홉스는 지금 이 순간 100년 뒤 세계의 미래보다도 그 점이 더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정확히 그렇게 생겨먹은 질문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대신 그는 알아서 대충 설명하라는 뜻을 담은 눈총을 쏘아 보냈다. 리케이온 학생 회장쯤 되면 그 정도의 간단한 의사 표현은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아니, 답지 않게 비밀 같은 소릴 하고··· 단어 선택이 제법 귀여워진 것 같아서.”
뭐? 홉스의 손에서 힘이 살짝 빠진 틈을 타, 베이컨이 가볍게 손을 뿌리쳤다. 조금도 거칠지 않은 동작이었지만, 그로 인해 두 손이 멀어지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비밀은 처음부터 없었어. 물론, 비밀을 밝혀내고 싶어 하는 바람도.”
“···그래, 이번에는 그 말이 마음에 안 들었다··· 라는,”
홉스가 조용히 말했다. 사전에서 뻔히 가르쳐줄 법한 단어들의 의미나 가지고 장난질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따위 의미야 알 게 뭔가, 비밀이든, 사실이든, 원리든, 이치든, 진리이든 간에··· 당신은 그것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랜시스 베이컨이 아무리 과학과의 중심이라 한들, 하루 종일 실험실에나 처박혀 있는 사람을 신경 쓸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원래라면 손을 다쳤든 갈아먹었든 끝까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오직 홉스 한 사람의 눈을 피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홉스가 그걸 안다고 해서 특별히 유난을 떨 것도 아닌데― 과학자로서는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을 비효율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학교 구석구석 안 닿는 곳이 없는 토마스 홉스의 시야에서 그 혼자만은, 끝까지 고고하게 홀로 벗어나 있겠다는 듯― 그리고 다음 순간, 홉스는 자신이 이 모든 말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생각이 소리가 되어 튀어나오고 있었는지는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베이컨의 표정을 봐서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원래도 홉스가 무슨 말을― 행동을 하든, 그와는 전혀 관련 없이 제 기분대로 반응을 출력하곤 했으니까.
명백히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툭, 이라는 의성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만큼 가냘픈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소리 없이 떨어진 얇은 장갑이 바닥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홉스의 시선이 한순간 장갑의 움직임을 따라 그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베이컨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