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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부터 밝혀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건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빠듯한 일상에서 잠깐 벗어난 일탈의 감각과 졸업 전 마지막 여행이라는 상징성, 고등학생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과거-미화-필터를 다섯 겹쯤 낀 시선 속에서 기꺼이 청춘으로 불려 온 열여덟 살의 나이, 특별히 볼 것도 없으면서 그저 계절이 여름이니까, 따위의 시시한 사유로 여행 중반에 툭 끼어든 파란 바다―
바다. 그러한 배경이 아마도 이 이야기를 쓸데없이 낭만적인 차원으로 도약시킬 만한 가장 큰 위험 요소일 것이다. 그야말로 쪄 죽기 직전의 여름, 햇빛은 누구 한 명쯤 죽일 기세로 때려 붓는 중이었고. 그 때문에 아무도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있기는 했지만, 펼쳐진 바다를 호흡기로 느끼기란 어렵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단단히 부여잡은 라이프니츠가 용감하게 하늘을 올려다본 바에 따르면, 하늘에는 희고 깨끗한 구름 몇 점이 평화롭게 떠 있었다. 코 근처를 간질거리는 짭짤한 바다 내음이 어떠한 충동을 자극했다. 어쩐지 숨을 크게 들이켜고 싶다는― 이미 깊이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 따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도저히 침착할 수 없는 날씨 속에서도 사람을 얼마쯤 너그럽게 만드는 공간이라 해야 할지. 물론 라이프니츠는 그 와중에도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 여전히 수리과 인원 전체를 통솔하는 일은 라이프니츠가 거의 전담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창 수리과를 폐지하니 뭐니 논쟁이 들끓던 작년보다도 수가 더 줄어든 인원이라 조금 수월해지기는 했다. 그사이 추가로 전과한 사람도 있고, 아니면 수리과 소속이기는 하지만 뭐 개인 사정, 역시 가장 흔한 건 건강 문제, 아니면 집안 문제··· 등등.
집안 문제. 귀한 집 자제가 많은 수리과 학생들 사이에서 슬슬 떠오르는 화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약혼자가 내정된 학생들은 보통 졸업 이후에 결혼이 예정되어 있거나 했지만, 이르면 졸업을 한 학기 남짓 앞둔 지금 시점부터 이래저래 양가 집안에서 호출이 잦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신분이 아직 고등학생인 만큼 공부하는 데 크게 방해는 안 되게끔 하겠다 하던데, 달리 말하면 졸업하는 순간부터 그런 최소한의 핑계도 사라지는 게 아닌가··· 라이프니츠는 그런 생각을 종종 했다. 콘웨이 가문도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물론 좋은 곳이고 또 좋은 사람들이라더라, 앤에게서 듣기로는 그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 개인의 인품에 대한 평가였으니까― 어쨌든 그 구조 안에서 그렇게 큰 영향력을 기대할 수는 없는.
라이, 미안해! 이번에는 같이 못 갈 것 같아··· 세상에서 제일 미안하다는 듯이, 라이프니츠의 손을 꾹 잡아 누르며 그렇게 말하던 앤의 얼굴. 괜찮아, 앤. 라이프니츠는 그 손을 가볍게 한번 쓸어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스치듯 맞닿아 있던 두 손이 저항 없이 부드럽게 멀어져갔다. 고마워, 이따가 교실에서 봐··· 어떤 무게도 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머리 위쪽에서 경쾌하게 흔들리는 앤의 손을 바라보다가,
앤, 잠깐만···
“라이!”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에, 앉은 채로 졸고 있던 라이프니츠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짭짤한 바다 내음이 코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어쩐지 숨을 크게 들이켜고 싶어지는··· 정수리를 불태우려 드는 햇빛 대신 서늘한 밤공기가 느껴졌다. 시리도록 파란 바닷물과 희고 깨끗한 구름 대신, 하늘이고 바다고 온통 컴컴한 것 천지로 뒤바뀐 채였다. 어깨를 조심스럽게 짚어오는 앤의 작은 손만이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좀 늦었지··· 애들이랑 재미있게 놀았어?”
“놀기는 무슨. 한놈 한놈 다 챙긴다고 진 빠져서 그럴 기력도 없어.”
“아하하··· 그렇지, 라이는 맨날··· 안에 들어가서 좀 쉬지 그랬어?”
“···아무리 그래도, 와달라고 불렀으니 기다리는 게 예의겠지.”
한번 결론이 난 일을 자주 돌아보는 성미는 아니었다. 보내버린 것이 정답임을 확신한다면 더더욱. 그렇게 확신한 게 틀려도 괜찮다. 최고가 아니라도 괜찮다. 시정의 기회는 언제나 있고, 그렇게 한 걸음씩 정직하게 나아가는 게 라이프니츠를 더 단단하고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으니까. 결론은 났다. 방금 손에서 놓아 버린 그것이 정답이다. 거기에는 무언가를 추가로 덧붙일 여지도 없고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없었기에, 모든 것이 깔끔했기에, 그 무엇이든 더 이상은 없다― 그 생각이 문득, 앤, 잠깐만··· 혹시라도, 시간이 조금이라도 난다면,
늦게라도 괜찮으니까 잠깐 와도 돼.
마지막으로, 부디 잠깐이라도 들러달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밖에 전할 수 없었던 건 그의 미숙함이었고,
정말 그래도 돼?
그런 미숙함에 기꺼이 어울려준 것은 네 상냥함이었다. 일정을 확신할 수 없으니 약속하자는 말을 쉽게 꺼내지는 못해도, 한없이 가벼운 말에 그토록 무거운 진심을 담아서.
그리고 결국은 제대로 하지도 않은 약속을 따라 이 검은 바다 앞에, 라이프니츠의 옆에 마지막으로 발걸음해 준 것까지.
“와줘서 고마워, 앤. 바쁠 텐데···”
“···응? 아냐! 내가 꼭 오고 싶었으니까, 나야말로 라이가 불러줘서 고맙지.”
“늦게라도 얼굴 봐서 좋긴 한데, 바다가 잘 안 보이는 건 아쉽네. 낮에는 예뻤는데.”
“지금도 엄청 예쁜데? 봐봐, 저기!”
온통 시꺼멓기만 한데 뭘 보라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라이프니츠는 열정적으로 뻗어대는 앤의 손가락 끝을 따라 별 기대 없이 시선을 던졌다. 새까만 바닷물이 반짝거리고는 있었으나 큰 감흥은 없었다. ···어, 예쁘네. 그런 덤덤한 대답만이 입에서 끌려 나왔다.
그날의 여행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그 짧은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미리 밝혀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건 바다라는 낭만적인 배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라고. 남는 거라곤 고작, 앞으로 계속 나아갈 누군가의 삶의 어느 한 지점에 붙들려 있던 라이프니츠가, 인생 처음으로 저질러 본 유치한 떼쓰기 그것 하나뿐이다. 정해진 결론, 확실한 정답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그러니 이것은 끝내 시시콜콜한 사랑 이야기조차도 될 수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