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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과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이 그렇듯, 그날의 사건 또한 르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었다.
있지, 어째서 이렇게 더운데 밖에다가 축제 부스를 만들어야 할까?
응?
물론 캠퍼스도 넓으니까 바깥에 준비해도 좋긴 하겠지만··· 우리가 뭘 많이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더운 날에 야외 활동을 오래 하기엔 우리 반 애들이 그렇게 건강한 편은 아니잖아. 차라리 교실을 꾸며서 교실에다가 부스를 준비하면 어떨까? 그러면 축제 때 부스 구경하는 애들도 여기서만큼은 좀 시원하게 놀 수 있고.
그거 되게··· 좋은 생각이네.
뭐라 반박하기엔, 그날의 낮 기온은 32도였다.
그렇게 축제 전날, 수리과 일원들은 교실을 꾸며서 부스를 만들게 되었다. 홍보 포스터도 여러 장 뽑아서 돌리고, 넉넉하게 사 온 색색의 시트도 잘라서 교실 벽이나 바닥에 붙일 계획이었다. 문제는 시트의 길이를 재는 데서 발생했다.
“우리 줄자 있어?” 가위를 손에 든 채로 시트를 펼쳐 보던 벤 스피노자가 물었다.
“아··· 맞다, 같이 사 왔어야 했는데, 까먹었다.” 아르노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그럼 어떡해. 그냥 대어 보고 눈대중으로 대충 잘라? 벤이 별 뜻 없이 물은 말에, 라이프니츠가 반대하고 나섰다. “대충이 어디 있어, 수리과에. 당연히 정확하게 계산해서 잘라야지.”
“그건··· 맞지. 그런 거 눈대중으로 대충 자르면 꼭 망치더라고···” 소피의 말이었다. 모든 걸 그렇게 빠듯하게 계산하고 싶어 하는 수학귀신들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연극부로서 무대를 꾸밀 때 비슷한 경험이 많았던 소피는 정확한 계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사 오든가 해야지··· 애초에 목록을 내가 적어줬어야 했는데.” 라이프니츠가 얼핏 니들을믿은내가잘못이지 쯤으로 들리는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피까지 라이의 말에 동의한 참이니 가만히 입을 닫고 있던 벤이, 그 말을 듣고는 결국 받아치고야 말았다.
“그래서 다시 갔다 오라고? 내려가는 동안 해 다 지겠는데.”
“넌 네가 갈 것도 아니면서 웬 불평이야. 아니면 네 7년 된 핸드폰 자 어플로 열심히 재 보든가. 15cm쯤 하던가? 재는 동안 해 다 지겠네.”
벤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교실 한쪽 벽을 보았다. 수리과 교실은 꽤 넓은 편이었다. 게다가 교실뿐만 아니라 교실로 오는 길과 복도를 꾸미는 데도 줄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길어 봤자 15cm에 불과한 핸드폰 자만 가지고서는 무리였다. 차라리 라이프니츠의 말처럼 한 명이 얼른 가서 줄자를 구해 오고, 그동안 남은 사람들이 다른 작업을 하는 게 무난한 정답이겠지만···
“15cm 자 가지고는 오래 걸린다는 말이지?”
가위바위보에서 지는 바람에 방금 아르노와 함께 나갔다 온 페르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라이프니츠의 말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옳다 한들, 그날의 낮 기온은 32도였으며 그 누구도 밖에 다시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쩐지 의미심장한 눈으로 친구들을 한 명씩 훑어보던 페르마의 눈길이 마침내 라이프니츠에게 와서 멎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파스칼이 무언가 깨달은 듯 나지막하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라이프니츠가 좋겠지. 우리 중에 가장 크니까.” 페르마가 말했다.
뭔 소리야? 라이프니츠가 해설하라는 듯이 파스칼을 쳐다보자, 파스칼이 자신도 긴가민가한 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프니츠, 너 키 187cm인 거 확실하지?”
1학년 C반의 반장 임마누엘 칸트는 2학년 복도를 걷고 있었다. 2학년 선배들이 쓰는 복도를 지나가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그는 1학년 복도를 지날 때도 늘 조금쯤은 긴장하고 있었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마침 2학년 A반 수리과 교실에서 축제 준비를 한다기에, 칸트는 오랜만에 소피아 선배한테 인사드릴 생각을 하며 창문으로 수리과 교실을 건너다보았다.
수리과의 부반장인 라이프니츠가 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칸트는 바로 뒷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민 채로 앞에 보이는 아무한테나 물었다.
“···저, 혹시, 이게 다 무슨 일인가요?”
“오, 안녕 칸트. 우리 축제 부스 준비 중이지. 그나저나 너 혹시 줄자 있어?”
“그럼 지금 줄자··· 가 없어서, 혹시 이런···”
“세로 길이는 대충 6.3라이프니츠인가··· 좋아, 나머지는 핸드폰 자로 재면 되겠다.”
칸트의 빛나는 도덕법칙을 바탕으로 하는 이성은 그 광경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난생처음 보는 상황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총명한 사람이었다. 사람에게 손가락질하면 안 된다는 것도 잊고 손가락을 든 채로 미세하게 떨고 있던 칸트가, 바로 그다음으로 들려온 말에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소수점 셋째 자리에서 반올림하면 11.8m야. 약 6.31라이프니츠 정도네.”
“인간의 수단화잖아요!!!!”
수리과 교실에 칸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하필 가위를 들고 있어서 미처 귀를 막지 못한 벤이 고개를 들더니 헛소리를 했다. 응? 스파게티가 뭐라고?
“···진정해, 칸트.” 소피는 이런 꼴을 보고 ‘그 칸트’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나서서 말리기를 시도했다.
“어떻게, 아니, 그럼 저한테 줄자가 없으면 이··· 상황이 지속되는 건가요? 제게 반드시 줄자를 구해와야만 하는 의무가 생긴 거죠? 그래야만 이 모든 것을 멈출 수 있는 건가요? 차라리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소피아 선배님!”
자신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칸트의 목소리에, 소피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4년을 다닌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이 흐릿하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임마누엘 칸트, 목적론과 정언명령···
“자, 들어봐. 칸트. 분명 사람을 자 대신 쓰는 건 인간의 수단화라고 볼 수 있지만··· 분명 수단만은 아니야.”
“네?”
이야기는 몇십 분 전으로 돌아간다.
“내가 그냥 빨리 뛰어서 갔다 올까?” 소피가 그렇게 말을 꺼낸 시점이었다. 그냥 빠르게 갔다 오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자기가 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라이프니츠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딘지 모를 거잖아. 설명만 듣고 가기엔 길이 복잡해.”
아, 그러면 좀 힘든데··· 체력이나 스피드는 자신 있는 소피였지만, 안 그래도 초행인 데다 복잡하다는 길을 잘 찾을 자신은 아무래도 없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앤이 머뭇거리며 제안했다.
“내가 같이 갈까? 소피한테 길도 알려줄 겸 해서.”
앤이 같이 가면 혼자 가는 것만큼 빠르게 갔다 오지는 못할 텐데. 소피는 자연스럽게 앤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이미 니체를 들고 비슷한 짓을 해본 적 있었으니까. 어차피 누가 같이 가든 들고 가는 게 제일 빠를 텐데, 그럼 차라리 제일 가벼운 앤이 동행으로는 제일 낫지 않나? 결심한 소피가 입을 떼려는 순간, 앤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날이 덥기도 하지만, 앤은 오늘도 고질병인 두통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됐어, 가지 마. 날도 더운데. 너희 말대로 한 번 해보기나 하자.”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라이프니츠도 소피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라이, 정말 괜찮겠어?”
“그냥 내가 고생 좀 하는 게 낫지. 하긴 하는데, 계산 실수하면 다 죽일 거야. 알지, 스피노자.”
“이상한 걱정을 하네. 우리가 계산 실수로 시험 점수 깎이는 애들인 줄 알아?”
“차라리 실수로 깎이는 점수면 내가 말을 안 하지···”
그렇게 수리과의 축제 부스 준비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아이들도 길쭉한 라이프니츠의 신장 때문에 측정이 금방금방 이루어지자, 신이 나서 계산에 참여했다. 아, 이쪽은 2.8라이프니츠인데. 저쪽은 어때? 그거의 절반보다 조금 긴 정도··· 그럼 1.5라이프니츠 정돈가? 애매한데, 라이, 이쪽도 좀 와볼래? 저기는 적어도 5라이프니츠는 될 것 같아··· 그렇게 여기저기 바쁘게 불려 다니다 보니, 처음에는 떨떠름하던 라이프니츠도 점점 더 자기가 나서서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온 사방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고 있는 데다 모든 곳에서 라이프니츠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 기분이 조금 들뜨긴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건 사람을 수단과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2.5라이프니츠였던 시트를 2.1라이프니츠 길이로 자르고 있던 벤마저도 가위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소피 쪽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소피의 이야기를 듣던 칸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요···?”
아 역시 안되나.
여러 의미로 소란스러웠던 축제가 끝났다. 축제는 잘 끝났지만, 그 이후로도 수리과는 한동안 이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날 축제 준비를 너무 열심히 한 탓인지, 다들 1.87m라는 숫자가 지나칠 만큼 뇌리에 깊숙이 새겨져 버린 것이다. 한동안 길이를 대볼 수 있을 만한 모든 사물이 라이프니츠 단위로 보였다. 잠깐, 저건 0.7라이프니츠 정도인가? 아니, 0.5라이프니츠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야, 저거 봐봐. 저거 딱 1라이프니츠 같은데. 아니다, 조금 더 긴가? 그럼 1.15라이프니츠 정도··· 마치 자동차의 4자리 번호판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나눗셈해 보는 것처럼, 그들은 한동안 모든 사물에 대해 습관적으로 라이프니츠 단위를 적용해야만 했다.
교실에서 누가 들떠서 소리를 지르길래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나 해서 가보면 하는 소리가 이 따위였다: 야, 이거 길이를 재 보니까 3.497m야! 1라이프니츠가 1.87m인데 이건 약 1.87라이프니츠인 거라고! 신기하지 않아?
어딘가에서는 벤 스피노자가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응, 뭐라고? 역시 0.95라이프니츠 높이에서 말하는 건 잘 안 들리네··· 너는 그냥 말하면 되겠지만 나는 0.97라이프니츠에서 듣고 있으니까 전달이 잘 안되는 것도 이해하지?
그 모든 소동은 날이 점점 더워지면서 라이프니츠가 머리카락을 올려 묶기 시작했고, 올려 묶은 머리 기준으로 약 190cm가 되면서 다소 갑작스럽게 종료되었다.
“근데, 1.9m면 오히려 예전보다 계산하기 더 편해진 거 아니야?”
소피가 제기한 의문에, 르네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답했다.
“음, 글쎄···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게 딱 떨어지는 숫자보다 1.87m 쪽이 훨씬 더 계산하는 게 재밌어서 그런 게 아닐까?”
소피는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었다. 리케이온 수리과에서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