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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
    순철논 2025. 9. 15. 23:26


     르네 데카르트가 그 연락을 받은 건 오전 일곱 시쯤이었다.

     그러니까 그날은 운이 아주 좋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보통은 오후에야 느지막이 눈을 뜨는 그가, 평소 같았으면 그 시간에 바로 연락을 받을 수 있었을 리가 없으니. 그러나 하필 그는 논문 초고를 작성하느라 밤을 꼬박 세운 참이었고, 따라서 메시지가 오자마자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글자를 제대로 인식하는 데는 평소보다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부고였다. 사실 글의 종류나 내용 때문에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더 걸린 것은 아니다. 르네는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으며, 심지어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조차도 그의 잠을 깨우지는 못했다. 그는 굳이 눈을 비빈 뒤에 글을 꼼꼼하게 다시 읽는 등의 액션을 취하지는 않았다. 르네 데카르트가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 한 번 읽는 것으로 충분했으니까. 그게 부고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는가― 이해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라고 한들 예외가 있겠는가.

     ‘B’로 시작하는 이름이었다. 아··· 그럼 혹시 ‘베네딕투스’?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을 향했다. B.d.Spinoza. 어, 진짜네. 왜 벤의 이름이 가장 먼저 생각났는지는 모르겠다. 르네가 아는 이름 중에서, B로 시작하는 이름은 적어도 수십 개가 있었는데.

     어쩌면 그리 의외라고 생각되는 소식은 아닌지도 모르지.
     언제나 벤은 르네가 찾을 때만 모습을 비출 뿐,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아주 중대한 소식― 엄청나게 좋은 소식이나 극단적으로 나쁜 소식이 아니라면, 그쪽에서 연락이 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그래서 어쩌면, 이미 만신창이가 된 그의 인생에 모종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정도로 좋은 소식은 웬만하면 생기지 않을 거라고··· 무의식중에 그리 단정해 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결론, 벤의 부고는 그렇게까지 충격적으로 놀라운 소식은 아닌 거야.

     아니면 핸드폰 화면 속의 딱딱한 폰트로 적힌 이름에서는 느껴지는 게 덜하다든가··· 봐봐, 조금 멀리서 보면 딴 사람 이름 같기도 한데.

     학술지에 실을 글, 혹은 가벼운 사설··· 종류가 무엇이든, 벤은 글을 끝맺고 나면 하단에 휘갈긴 필체로 제 이름을 서명했다. 그 특유의 필체는 르네의 머릿속에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맨 처음 오는 B를 크게 쓰고, 중간의 d는 그보다 훨씬 작게. 이어지는 성은 말 그대로 본인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아무렇게나 휘갈기는 게 핵심이었다. 아무리 눈이 빠지게 들여본다 한들, S만 겨우 알아보는 게 고작일 때도 많았다. 이게 뭐야~ 알아볼 수 있게 좀 써줘! 르네가 투덜거리면, 응? 잘만 알아봤으면서. 그렇게 말하며 웃는 벤이 있었고.

     르네는 노트북을 대충 앞으로 밀어 놓고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장례 일정을 공지하는 몇 개의 숫자가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가야겠지. 가야 하는데··· 내일까지 초고를 다 쓰면, 모레는 하루 정도 시간을 뺄 수 있을 테다. 다음날까지는 좀 무리겠지만··· 부족한 잠은 오고 가는 길에 보충하면 되겠지? 네덜란드라, 오랜만인데··· 그럼 간 김에 벤 만나고 올까? 오랫동안 못 봤으니까.

     아, 벤 때문에 가는 거였지.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급한 일은 대충 끝났으니 일단 좀 자고 나중에 생각할까.

     컨트롤 S를 꾹꾹 두 번 눌러 파일을 확실하게 저장한 르네가 노트북을 껐다. 세 발짝만 걸으면 닿을 수 있는 침대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늘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이불 속으로 꾸물거리며 들어간 뒤에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었다. 마침내 눈꺼풀을 막 닫으려는 순간, 핸드폰 화면의 밝은 불빛이 눈을 찔러왔다. 아, 또 뭐지. 중요한 연락이 아니라면··· 그러나 문득 화면을 봐 버린 그는 제법 귀찮은 이름을 마주하고 만다― 라이프니츠.

     핸드폰을 24시간 상시 무음 모드로 해놓는 르네였기에, 평소 걸려 오는 전화를 바로 알아챌 확률은 극히 낮았다. 오늘따라 어쩐지, 억지스러울 만큼이나 우연에 우연이 계속 겹치는 듯한 기분이다.

     “···여보세요···”
     “웬일이야? 전화를 다 받고. 밤 샜어?”
     “응··· 무슨 일인데? 나 자야 돼···”
     “그냥··· 이런 미신에 휘둘리는 꼴이 우습긴 하지만, 간밤에 꿈자리가 사나워서. 오랜만에 안부 인사나 하려고 연락했지. 잘 지내고?”
     “응··· 다른 애들한테도 연락하는 중이야?”
     “···아니, 솔직히 연락할 사람 너밖에 없는데.”
     “앤은···?”
     “결혼식에서 봤을 때가 마지막이야. ···내가 연락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베네딕트 스피노자는 번호도 없고··· 그놈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사는 거야? 졸업 이후로 연락이 된 적이 있어야지. 잘 있지? 너랑은 연락될 거 아냐.”
     “응··· 잘 지내.”
     “그럼 됐어. 목소리 다 죽어가는 거 봐라. 얼른 자. 가끔 연락하고.”
     “으응···”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린 르네가 핸드폰을 대충 옆으로 던졌다. 방은 다시 완벽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기분 좋은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 일만 남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그대로 몇 분쯤, 정면의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말 그대로 몇 분, 혹은 그보다 조금 더 시간이 흘렀는지도.

     벤이 죽었다.

     르네는 손을 뻗어서 방금 옆으로 던져버린 핸드폰을 다시 집었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불을 밝힌 화면에는, 라이프니츠의 번호가 찍힌 최근 통화 기록이 그대로 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 신호음이 가기 시작했다. 따르릉― 하는 클래식한 신호음이 두어 번. 라이프니츠는 전화를 빨리 받는 편이었다. 아마도 세 번째 신호음이 채 다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신호음이 시작되기 전에, 르네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좋아, 그럼. 할 말이 정리가 되면 그때 라이한테 전화를 하자. 그리고 르네는 그런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아니면 역시 한숨 자고 나면 머리가 좀 돌아가려나? 그래, 자자! 딱 세 시간만··· 열 시까지만 자고, 그때 일어나서··· 문득 확인한 시계는 이미 10시 1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르네는 꿈결 같은 동작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항상 의자 팔걸이에 걸어 놓는 크림색 카디건을 집어서 걸치는 동안, 발은 일정한 속도로 집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신발 속에 발을 채 다 구겨 넣기도 전에, 필요 이상으로 큰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르네를 집에서 내보냈으니 이젠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한껏 얌전한 소리를 내며 평화롭게 닫히는 문― 달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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