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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벤솦
    순철논 2025. 8. 25. 22:19

     

     사고가 나는 건 한순간이야. 어른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건 한순간에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이 보기에는. 넘어지는 중인 소피 입장에서야,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세계가 세 번쯤은 멸망했다가 재창조되는 줄 알았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뜀박질이었다면 하나, 둘, 하나, 둘, 하는 규칙적인 동작으로만 구성되어야 할 궤도 사이에 괴상한 변주가 끼어들었고―선율로 비유하자면, 음악을 아예 망쳐버릴 만큼 눈에 띄는 불협화음으로!―발목이 영 일반적이지 않은 각도로 꺾임과 동시에 상체가 속수무책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그대로 얼마간 공중에 애매한 자세로 뜬 채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실로 공포스러운 시간까지 실컷 음미한 다음에야 추락했다.

     무릎이 지면에 처박히기 직전, 소피는 옆에 있었던 벤의 모습을 언뜻 보았다. 놀란 듯이 약간 커진 눈, 금방이라도 제 이름을 부를 듯이 살짝 벌어진 입,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다급하게 손을 뻗는 모습까지― 아마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한두 걸음만 더 가까웠더라면, 벤은 아슬아슬하게 소피를 잡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걷고 있었더라면··· 그러나 가정은 후회가 드는 상황에나 하는 것이고.

     후회가 드는 상황이라면 이미 통렬히 늦은 셈이다.

     앞서 걷던 학생이 서넛쯤 돌아볼 만큼 요란하게 넘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쪽팔림이란 감정이 밀려들었다. 비록 넘어지는 걸 잡아줄 수 있을 만큼 밭은 거리는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개중에서는 가장 가까이에서 그 꼴을 감상한 벤의 한 줄 소감이 일품이었다.

     “···저런.”





     불행히도 넘어진 지점이 보건실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위치였으므로, 그들은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벤의 아지트로 향했다. 아지트 안에 발을 들인 순간, 소피는 처음 보는 공간임에도 어쩐지 아주 익숙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깔끔하게 잘 꾸며 놨네.”

     원래 세계에서 자주 놀러 갔던 친구의 원룸 자취방과 비슷한 구조였기에. 물도 잘 나오게 해 놓은 것 같고, 나름 요리도 할 수 있고. 아담한 크기의 책장도 스피노자답게 온갖 책들로 알차게 채워 놓은 데다, 한편에는 오래된 티는 나지만 그래도 관리가 제법 잘 된 듯한 소파까지 있었다. 그 소파에 편한 자세로 드러누워 책을 읽으며 뒹굴거리는 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뭘 생각했길래?”

     받아치는 문장은 의문형이었지만, 벤은 소피를 등지고 선 채로 서랍을 바쁘게 뒤적거리고 있었기에 소피는 꼭 대답해야 할 의무를 느끼지 못한 채로 소파에 앉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이 아지트 안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듣고 있자니 묘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여자애가 여기 들어온 건 처음인데.”
     “그래?”

     방금 말이 정적을 깨보려는 벤 나름의 시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소피는 어차피 ‘그래?’ 이상의 대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벤과 친한 남자애들이야 아지트에 종종 드나들었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르네라든가). 여자애가 처음인 건··· 뭐 당연하겠지. 수리과에 여자애라 해봤자 몇 명이나 된다고.

     다행히 벤도 그리 독창적인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소피를 향해 돌아선 벤의 손에는 연고와 소독용 솜, 반창고 따위가 들려 있었다. 

     “웬만하면 보건실로 가는 게 나았겠지만··· 하필 다리를 다쳤으니 어쩔 수 없지.”

     한숨처럼 내뱉은 벤이 소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실례할게.”
     “잠깐··· 내가 할게.”
     “노는 손이 여기 두 개나 있는데? 그냥 있어도 돼.”

     그렇게 말하면서도, 벤은 소피의 상처투성이 무릎을 향해 뻗으려던 손을 얌전히 뒤로 물렸다. 하긴, 혼자 하겠다고 무릎을 붙잡고 낑낑거려봤자 지켜보는 사람의 안타까움만 더해줄지도. 게다가 여기는 벤의 아지트이기도 하니까··· 듣고 보니 은근히 납득되는 말이었다. 소피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승낙하자, 벤은 지체하지 않고 소피의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생각보다 심하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의 정도로 알 수 있었다. 나이 먹고(앞에 있는 사람은 무려 근대 철학자지만, 어쨌든 고등학생이니까) 상처가 아프다는 이유로 악악거리는 꼴은 보이기 싫으니 입술을 악물고 참을 뿐.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이기까지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지만, 어쨌든 응급처치는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어릴 때 다니던 소아과 의사 선생님이 연상될 만큼이나 능숙한 솜씨였다. 그러고도 뭐가 불만족스러운지,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던 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소피를 만류했다.

     “잠깐, 소피.”
     “왜?”
     “발목도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

     소피는 또 한 번 ‘왜?’ 하고 대답하려다, 어쩐지 같은 말이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상황이 어색해서 적당히 말을 돌렸다.

     “발목은 괜찮은데?”
     “그래? 아까 분명 꺾이는 걸 봤는데··· 정말 괜찮다고?”
     “그건··· 지금 보건실 가면 돼.”
     “기왕 이리로 온 김에 확실히 살펴보고 가지 그래. 들어온 게 아깝잖아.”
     “내가 여기 오래 있으면 불편하잖아.”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나 불편해 보였어?”
     “···조금?”

     사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느낀 대로 솔직히 답하는 게 낫지 않을까 했다. 아지트에 들어올 때부터 벤이 하는 말이 어쩐지, 웬만하면 소피를 자기 아지트 안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들려서. 물론 느낌이고 직감이라지만, 사람의 직감이란 의외로, 은근히 쓸만하다.

     흐―음, 하고 노래하듯이 음을 늘리며 대답을 미루는 벤이 오늘따라 왠지 더 얄미워 보였다. 벤은 대답을 회피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일단 대답을 고민하는 것처럼 말을 늘리며 시간을 끌지만, 사실은 애초에 대답할 생각조차 없다··· 그건 벤의 입가에 자리한 능글맞은 미소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싶으면 냉큼 다른 화제를 꺼내서 대화의 주도권을 홀랑 가져가기까지.

     보통 고단수가 아니란 말이야. 하지만 여기서 실책이라고 할 만한 점을 꼽자면, 이럴 때는 그냥 거짓말하는 게 낫다는 점이다. ‘불편하지 않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굳이 대답을 회피하는 행동 자체가 불편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니까. 벤의 태도가 워낙 자연스러워서 넘어가기 쉬운 사실이지만, 소피로서는 조금만 머리를 굴려 봐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벤이 말도 없이 대뜸 발목을 손으로 꾹 누를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들어온 공격(?)에, 방심하고 있던 입에서 작게 아,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오, 미안. 여기가 더 아픈가 보네.”

     아니, 사실은 무릎이 더 아팠고 지금은 그냥 방심하고 있었던 게 크지만. 그나저나 발목이 더 아픈 걸로 인식했으면서도 계속 주무르는 건 대체 어느 세계 상식인 거지? 뜬금없이 웬 발목 마사지를 받고 있자니 아픈 것 이전에 어딘지 뻘쭘했고, 무엇보다 간지러웠다. 한바탕 웃어버릴 뻔한 위기를 넘기고, 소피는 겨우 한 마디를 입 밖으로 꺼내는 데 성공했다.

     “그만해.”

     그 말은 소피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도 더 무뚝뚝하게 튀어나왔다. 벤은 즉시 손을 놓고서는 장난스럽게 항복한다는 듯,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인 채로 물러나 앉았다.

     “좀 괜찮아?”
     “덕분에.”
     “같이 갈까? 보건실까지.”
     “···됐어.”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는 벤의 시선이 뒤통수에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소피는 잽싸게 가방을 챙겨서 아지트를 나섰다. 별로 서두를 이유는 없긴 했지만, 자신이 아지트를 침범하는 걸 벤이 불편해한다는 사실도 알아냈으니 굳이 느긋하게 나올 이유 또한 없었다.

     다만 아지트로 올 때는 벤의 부축을 받았다 보니, 소피 스스로도 제 발목이 얼마나 심하게 꺾였었는지 몰랐다는 사실이 패착이었다고 할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발목을 다쳤다는 사실을 잊고 평소처럼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에― 정말 방심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그러나 가정은 후회가 드는 상황에나 하는 것이고. 후회가 드는 상황이라면 이미···

     이번에는, 늦지 않았다.

     “조심.”
     “아··· 고마워.”
     “어쩐지 그냥 보내기 싫더라.”

     어느새 밖으로 따라 나온 벤이 소피의 손목을 잡아 지탱했다. 소피가 다시 중심을 잡는 걸 보고 손목을 놓아준 벤은 별다른 말도 없이 옆에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다시 얼마간 멀어진 거리에서··· 조금도 닿지 않는 거리에서.

     무언의 약속처럼 보건실을 향해 나란히 걸으며, 소피는 벤이 그전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걷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언제 넘어져도 손만 뻗으면 붙잡을 수 있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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